윤성희, 『베개를 베다』, 문학동네, 2016.

일상의 의미

  윤성희는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상처와 회복, 관조와 공감이 발견되는 세간의 일상을 다채롭게 구성한 이야기들"을 쓰는 작가다.(백지은, 「최대 소설의 기도」, 255쪽) 이번에 출간된 『베개를 베다』에 수록된 열 편의 단편소설들도 예외는 아니다. 인물들이 밥을 먹고 길을 걷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끝나는 것이 윤성희의 소설이다. 그런데 쇄말적인 것에 집착한다는 비판이나 지루하다는 인상이 떠오르기는커녕 오히려 참신한 발상에 몇 번이고 감탄하게 된다. 이러한 효과는 사소한 소재의 차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삶을 구성하는 직접적인 계기들로서 일상을 의미화한 결과이다. 실존은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먹고 어떤 말을 하는가에서 드러난다. 그런 면에서 윤성희의 소박한 사람들은 일상의 천재들이라 할 수 있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언행들을 통해 그들은 타인과의 정서적 유대관계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 그리고 인생을 핍진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윤성희의 소설에서는 서사시간이 길게 흐르지 않지만 일상을 통해 파편적으로 드러나는 정보들을 취합하면 한 인물의 생애가 대략적으로 그려진다. 「못 생겼다고 말해줘」는 맏딸의 자살 (혹은 죽음을 원했던 딸의 사망) 이후 전개되는 모녀의 가정사를 다룬다. 칠순 전후의 어머니는 딸과 삼계탕을 먹고 길을 걷다가 도로 위의 전신줄들을 보면서 오선지, 그리고 "학교종"을 떠올린다. 모녀가 삼계탕을 먹은 식당은 과거에 칼국수 집이었고 어머니는 삼십 년 넘게 그곳의 단골손님이었다. 딸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갔던 식당에서 어머니는 딸에게 전복 삼계탕을 주고 자신은 보통 삼계탕을 먹는다. 온정이 오가는 식사를 마친 후 집으로 가면서 모녀는 대화를 나눈다. 여기에 화자의 서술이 더해지면서 어머니의 인생을 서사화할 수 있는 세 가지 정보가 주어진다. 식사와 산책을 통해 촉발된 기억의 힘으로 우리는 타자와 만난다.
  첫째, 어머니는 어릴 적에 가난했고 배움의 권리도 누리지 못했다. 굳이 다른 동요가 아닌 "학교종"을 떠올린 이유는 "학교종" 악보의 "음표에 꼬리가 안 달"렸기(39) 때문이다. 어머니는 팔분음표를 읽을 수 없었고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둘째, 어머니는 마음 둘 곳 없었던 마흔다섯 살에 미혼모가 되었다. 술, 담배를 심하게 하던 외할아버지(어머니의 아버지)로부터 낙태를 강요당하던 시기에 그녀는 "학교종"을 불렀다. 결혼도 하지 않은 사십대 중반 여성의 출산 결심에 대한 주위의 반응은 그리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훗날 자녀들이 학교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등교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어머니는 자신에게 가해진 냉대를 견뎠을 것이다. 셋째, 어머니는 성장하는 딸들을 자랑스러워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녀는 딸에게 "니들이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자신이 "학교종"을 불렀으니 너는 "내 덕에 머리가 좋은 거"라고(37) 말한다. 화자가 반에서 몇 등을 했고 어느 수준의 대학을 졸업했는가와 같은 상징계적 정보들은 텍스트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적어도 어머니에게 있어서 "나"는 똑똑한 딸임에 틀림이 없었다.
  일상은 위로의 길이자 애도의 과정이기도 하다. "나"의 언니는 아마도 자살했고, 어머니는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약 2년 전부터 초등학교 동창생인 정은이네 슈퍼에서 어머니에게 줄 맥주를 산다. 정은에게는 형제 정민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부모는 정민을 잊기 원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그 슈퍼를 정민이네라고 부른다. 이웃집 자녀의 죽음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이니만큼 자기 딸의 자살을 인정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에 있는 "나"의 형부는 죽은 언니의 글씨체를 흉내 내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낸다. "나"는 언니의 상실과 모친의 현실도피라는 두 가지 불행 앞에서 괴로워하지만 어머니의 상처에 대한 성급한 처방전을 내리지는 않는다. 외상의 완치는 바랄 수 있고 가끔 실현되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잘 체득하고 있다. 다만 "나"는 어머니와 맥주를 마시고 윷놀이를 하면서 그녀의 곁을 지키고 일상을 공유한다.

  어머니의 말처럼 세상에 이런 게 있을까 싶은 것들을 상상하며 늙어갔으면 좋겠다. 매일 맥주 세 모금을 마시며. 쌍둥이 딸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을 때까지.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나는 자는 어머니를 깨워 윷놀이를 하자고 할 것이다.(53)

  살면서 우리는 비상한 일들을 통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큰 충격을 받는다. 윤성희의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 혹은 지인의 이혼, 질병, 죽음 등으로 인한 고통에 자주 연루된다. 그러나 그런 순간들은 텍스트 전면에서 재현되지 않는다. 윤성희에게 소설이 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음으로 인해 재구성된 일상이다. 윤성희는 알고 있다.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소중히 여기다 보면 모든 순간이 밝아지지만 특별한 것들만 찾아 헤매다 보면 모든 순간이 소모되고 만다는 것을. 1999년에 「레고로 만든 집」으로 등단한 이후 17년 동안 윤성희는 한 번도 그 진실을 망각하지 않았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0 18:3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