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한 볼펜과 후배를 위한 선물

강태경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부위원장

제 고등학교 시절 학원 선생님이 들려준 자신의 대학생활의 이야기입니다. 대중교통에서 성추행이 만연했던 시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생님은 백 원짜리 볼펜의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서 손에 꼭 쥐고 다녔습니다. 성추행을 당했다고 외쳐도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지하철에서 부대끼다보면 그럴 수 있지. 별걸 갖고 아가씨가 예민하게 구네”라고 사람들이 외면하던 시기에 선생님은 그 뾰족한 볼펜으로 성추행범의 손등을 찌르며 무엇이 추행이고 무엇이 추행이 아닌지에 대한 새로운 선을 그었던 것입니다. ‘펜스 룰’처럼,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팔짱을 끼거나 팔을 접고 붐비는 대중교통을 타는 것이 일상이 된 지금의 문화는 그 선생님 같은 분들의 고군분투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할만합니다.

미투 운동은 상식의 영역에서 가려졌던 성폭력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현재의 상식과 권력구조를 비판적으로 보지 않는 이상 형사상 증거가 용이하게 드러나지 않는, 위계형 성폭력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기존의 상식을 넘어 단호하게 ‘잘못되었다’는 목소리를 낸 분들의 용기를 지지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새로운 공동체의 규칙을 세우기를 희망하며 글을 시작합니다.

“늘 그래왔던 분위기 속에서 인권침해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2014년도 대통령청년직속위원회의 <대학원생 연구환경실태 보고서>에 실린 한 대학원생의 목소리입니다. 그가 말한 이 ‘늘 그래왔음’은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구조의 한 단면일 것입니다. 대학원에서의 성폭력, 그 중에서도 교수-학생 간 위계에 의한 성폭력의 심각성은 바로 그 굳어진 관계에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문제제기 할 때 걱정합니다. 약하게는 자신이 까탈스럽고 유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고, 심하게는 졸업을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위의 보고서에 따르면 65.3%가 부당처우를 당해도 참고 넘어간다고 응답했고, 그 이유는 “향후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48.9%)과 “해결 안될것 같아서”(43.8%)라고 응답했습니다. 심각한 무력감입니다.

대학원생이 두려움을 느끼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대학원생의 학위논문을 평가하는 교수의 권한에서 나옵니다. 대학원생이 두려워하는 괴롭힘의 유형으로 논문 지도과정에서 이유는 설명해주지 않으면서 계속 다시 써오라고만 하기, 역시 이유 없이 심사를 미루기, 일관성 없는 혹평, 면담 해태 등이 꼽힙니다. 졸업 이후의 진로를 두고도 대학원생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어디 가서 강의라도 하려면 내 말을 잘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압박, 학계에 대학원생에 대한 나쁜 평가를 퍼트리기, 동일 분야의 직종에 취직을 방해하기 등은 특히 좁은 학계일수록 효과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벌어진 성폭력에 대해서, 현재의 대학과 대학원의 권력구조 내에서는 어설프게 문제제기를 하느니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말이 나옵니다. 대학원생 입장에서 보면 성폭력 피해를 받은 대학원생이 가해자와 분리되기도 어렵고, 이후의 진로를 변경하지 않는 한 계속 부딪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공개적인 싸움이 발생한 경우 대부분은 여러 사건이 이미 누적되어 버린 경우입니다. 이쯤 되면 학위를 받은 뒤에 싸우거나 아예 학위에 미련을 버리고, 학위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각오를 해야 싸움이 시작됩니다. 미투운동이 과거의 이야기를 이제 와서 이야기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이렇게 곪아버린 현실과 구조적 문제를 강조하다보면 해법이 아득하게 멀어 보입니다. 구조적 한계를 지적하는 일이 듣는 사람에겐 ‘세상이란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의 현학적 표현으로 그칠 수 있다는 위험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학 가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거야’라는 소위 탈조선의 해법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국내 대학에 남겠다는 동료에게는 여전히 해결책은 아닙니다.

저는 이 문제를 대학원에서의 다수의 대학원생이 종사하는 노동의 문제와 결부하여 해법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대학을 유지하는 ‘권력관계’를 변화시키는 전략이며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이 출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식생산의 일터인 대학, 그 속에서 연구노동자인 대학원생의 역할과 이에 근거한 권리의 확보가 제가 제안하는 내용의 핵심입니다.

위계형 성폭력의 문제 때문에 당면한 권위를 해체하자는 주장은 직관적입니다.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투쟁은 뾰족한 볼펜이고, 우리가 해야만 하는 중요한 싸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새로운 원칙을 세운 뒤 그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권력도 필요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평등함도 평등을 유지하는 권력이 존재해야만 유지됩니다. 결국 우리가 “어떤 권력을 형성할 것인가?” 즉, “어떤 관계를 형성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보편적인 것은 지배적이라는 명제를 추가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대학을 지향하는 권력이 어떻게 지배적이게 만들 것인가?”가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난망한 질문에 대해 감히 답한다면, 저는 대학원생이 지식생산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로서의 권리에 기반을 둔 새로운 관계를 요구할 때 새로운 권력관계를 정립할 힘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대학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지식생산이고 대학원생과 교수는 그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입니다. 추상적 담론의 논의에서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도 2016년 약 3000억 원 규모에 달하는 산학협력단의 프로젝트들이 굴러가기 위해 대학원생이 하는 연구와 행정업무를 고려하면 대학원생이 대학을 운영하는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 노동자들인가에 대해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대학원생들이 현재 지식생산에 참여하는 유형인 조교, 프로젝트연구원, 학회간사 등의 노동 없이는 지금의 대학과 지식생산체계가 운영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관계가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지나치게 종속적이기 때문에 성폭력의 문제를 포함한 기타 인권침해가 극단적 양상을 보이는 것입니다. 노동권을 인정받지 못하다 보니 노동의 내용과 역할분배는 임의적이고 비체계적이게 되며, 결정적으로 교수의 호의에 기대게 됩니다. 때문에 대학원생이 자신의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받고, 그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음으로써 관계가 바뀌어야만 권력형 성폭력 역시 체계적으로 대학에서 몰아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종속적 관계는 대학원생이 연구노동자로 훈련받는데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부여받은 역할과 무관한 부당업무에 시달리기도 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교육을 제때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학은 보다 엄밀하고 정확한 지식을 생산해야 한다는 목적에도 위배되는 상황입니다. 연구노동자로서 대학원생은 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도제적 관계를 넘어서 다양한 연구노동자와 교류하여 폭넓은 지식에 대한 접근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대학원생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여 현재의 낡은 권위에 기댄 대학의 권력관계를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로 재정립하는 것은 대학이 발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저는 성차의 문제가 노동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문제가 여전히 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난 페미니즘 운동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이 여성의 주체적인 행동의 물적 기반이 됨으로써 중요했듯이, 위계에 의한 성폭력을 체계적으로 막을 수 있는 대학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전략으로서 대학원생의 노동조합운동은 깊이 검토될 만합니다. 같은 일을 하는 동료로 서로 관계 맺는 평등한 관계 자체가 새로운 권력을 형성할 것입니다. 우리가 뭉쳐서 한 세대를 건넌다면, 다음에는 반드시 대학원이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원생노동조합은 후배를 위한 최고의 선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