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남성과 드러내는 여성, 검은 시위

홍승은
인문학 카페 36.5도 대표

  최근 한겨레21에서 낙태와 관련된 인터뷰를 했다. 기사가 나오고 확인해보니, 나에게 붙은 이름표는 ‘낙태 커밍아웃 홍승은’이었다. 낙태 경험을 드러내는 일은 ‘커밍아웃’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금기를 건드리는 일이었다. 내 글을 읽은 주위 사람들은, 한국사회는 아직 보수적인데 네가 걱정된다, 라며 메시지를 보냈다. 글에는 ‘피임도 제대로 안 하고 즐기기만 하겠다는 것이냐, 책임감 없는 문란한 여자, 살인자, 낙태충’과 같은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한국 사회에서 낙태는 불법이다. ‘낙태’라는 언어도 ‘태아를 떨어뜨려 죽인다’는 뜻으로, 이미 임신중절에 대한 낙인을 담고 있다.
  이렇게 낙태에 대한 언어적, 법적, 사회적 낙인과 다르게, 내 삶에서 낙태는 친숙한 문제였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는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낳고도 세 번 임신했고, 세 번 수술했다. 두 번째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 날 참다못한 엄마가 루프 시술을 받았는데, 그런데도 임신이 됐다고 했다. 엄마에게 물어봤었다. 수술 받는 게 두렵지 않았냐고. 엄마는 수술보다 두려웠던 건 성관계라고 말했다. 한 번 잔 남자에게 무조건 시집가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따라 스무 살에 아빠와 결혼했던 엄마는 결혼 후에도 성애(sexuality)에 무지했다. 그런 엄마에게 섹스는 임신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엄마처럼 나도 섹스에 대한 무지와 죄책감을 학습 받으며 자랐다. 순결에 대한 압박과 남자친구의 요구 사이에서 강간과 구분되지 않는 첫 섹스를 했다. “콘돔은?”이라고 묻지 못한 건 당시의 나에겐 당연한 모습이었다. 이후 임신이 걱정돼서 콘돔을 요구하고 경구 피임약도 복용했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생리 주기가 돌아오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3년 전 나는 원치 않는 임신을 했고,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받았다. 수술이 불법이었기에 수소문해서 허름한 산부인과를 찾았다. 수술 후 하혈과 복통으로 고생하는 나에게 남자친구가 미역국을 끓여주었는데, 한 숟가락을 뜨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섹스는 함께였지만, 임신과 수술, 몸조리, 사회적 시선은 모두 내가 감내해야했다.
  몇 달 전 내 동생도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받았다. 동생의 남자친구는 자신의 학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수술 후 2주일 만에 잠적했다. 나와 동생이 이 문제를 공론화하겠다고 하자, 유명한 페미니스트였던 그의 엄마는 “큰일을 할 아이들이, 사소한 문제로 앞길을 망치면 안 된다”며 덮으라고 했다. 동생의 남자친구는 자신의 엄마 곁에서 상황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동생은 한 달 만에 살이 10kg 빠졌다. 임신은 함께 했지만, 동생의 몸만 불법이 되었다.
  나, 내 동생, 나의 엄마, 내 주위 사람들의 인공임신중절 경험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임신중절수술’ 그 자체보다 힘든 건,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서 오는 모멸감과 임신 후 겪게 되는 깊은 고립감이라는 점이었다. 지금도 동생을 향하는 ‘살인마, 낙태충’이라는 비난은, 잠적했던 남자친구에게는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아무 일 없는 듯, 대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동생에게 미안해서 힘들다고 말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생리 불규칙과 배신감에 잠 못 드는 동생의 아픔에 비할 수 없다.
  성인여성의 10명 중 1명이 인공임신중절 경험이 있다(연합뉴스, 2016)고 한다. 나 역시 경험하고, 목격했다. 인공임신중절은 이미 많은 여성의 삶에 걸쳐있다. 그럼에도 실재하는 여성의 몸은 지워지고 그 자리에 몸에 대한 찬반논쟁이 붙는다. 논쟁의 중심에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금기가 있다. 비난이 향하는 곳은 여성의 몸이다. ‘순결하지 못한 여성의 몸’은 ‘걸레, 창녀’라는 수식으로 비난받아 왔다. 실제로 기혼의 낙태 수술 비율이 50% 이상이지만, 대부분 낙태 이슈를 접하는 사람들은 미혼의 문란한 여성을 생각한다.
  미혼모, 인공임신중절, 영유아 유기 사건과 같이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재생산과 관련된 이슈에서 상대 남성은 손쉽게 지워진다. 심지어 현행 낙태죄에서는 수술한 의사와 여성만 처벌을 받는다. 그래서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검은 시위’에서는 이런 호소까지 나온다. “임신은 여자 혼자 하는가?” 당연히 아니므로 무슨 소리냐고 콧방귀 뀔 말이지만, 여전히 절실하게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임신은 여성 혼자 하는가? 왜 모든 책임과 비난을 여성에게 떠넘기는가?
  낙태는 ‘그녀’의 책임인가? 한 여성의 임신은 섹스만이 아닌, 수많은 사회적 요건(성교육 부재,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중 잣대, 강간문화 등)과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임신 후 여성의 선택도 사회적 여건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열악한 미혼모 지원, 사회적 편견, 여성 노동의 빈곤화와 보육제도, 교육제도의 위기와 같이 복잡다단한 현실이 교차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의 복잡함은 ‘선택’이라는 한 단어로 뭉개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낙태 이슈에서 남성이 드러나는 순간은 하나다. ‘남성’ 정부부처와 의사가 함께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범죄로 만드는 공모의 현장. 지난 10월 보건복지부와 산부인과 의사들은 여성의 몸을 두고 줄다리기를 했다. 보건복지부가 ‘임신중절수술을 한 경우’를 ‘비도덕적 진료 행위’라며 산부인과 의사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입법을 예고하자, 산부인과 의사들은 그렇다면 어떤 경우의 임신중절수술도 하지 않겠다며 여성의 몸을 볼모로 삼았다. 그들의 논쟁 속에, 당사자인 여성은 없었다. 이 일은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검은 시위’를 촉발시켰다.
  ‘내 자궁은 내 것이다’ 검은 시위의 대표적 구호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말처럼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바로 나다. 섹슈얼리티에서부터 임신, 출산, 인공임신중절의 과정까지, 자기의 몸에서 소외당해왔던 존재가 몸의 주인이 되는 과정이 검은 시위의 본질이다. 그 과정은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증언으로 터져 나온다. 검은 옷을 입고 그간의 몸과 사회와 언어로 부터의 소외, 그 오랜 죽음을 애도한다. 애도로 연대하고 권리를 외친다. 광장에 모인 여성들은 여전히 조심스러워하며 노출될까 마스크를 쓰기도 하지만, 더듬더듬 자신을 말하고 있다.
  한 개그맨이 말했었다. ‘남자들은 생각하고, 말하고, 설치는 여자를 싫어한다’고. 그의 발화는 오랫동안 여성들을 사적인 존재로만 위치시켰던 권력에서 비롯됐다. 이제 우리는 내 호흡, 내 목소리, 내 자궁, 나의 몸으로 말한다. “내 몸이 바로 나다. 나는 불법이 아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17 07:5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