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의 블랙홀



제7화 인자무적(仁者無敵)


“아영아.”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비틀거리기는 하셨으나, 어쨌든 지팡이를 짚고 서 있기는 하셨다. 타인에 의한 죽음에 직면하면, 꺼져가는 촛불도 다시 살아나나 보다.



“아버지!”



내가 쪼르르 달려가 아버지를 잡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웠다.



“수레가 없으니, 걸어가자꾸나.”



“아버지, 불가(不可)합니다.”



“아영아. 괜찮다. 이것도 다 하늘의 뜻인가 보다. 걷자꾸나. 내가 더 이상 걷지 못하면, 나를 내버려두고 성남이 모자와 함께 어머니를 데리고 가거라. 길 위에 오래 있다 험한 일을 당할까 염려된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성남이가 다가와 말했다.



“첨정(僉正) 어르신, 저자들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아버지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성남아, 네 공이 실로 크도다. 처분은 네게 맡기마.”



성남이가 도적들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적 주제에 훈련도 되어 있지 않군. 그래서야 어찌 지나가는 행인을 털 수 있다는 말이냐.”



“그... 그건! 며칠 째 이곳을 지나가는 놈들이 하나도 없어서...”

피죽도 못 먹은 인상의 갈퀴 용자(用者)가 말했다. 앞서 성남이를 공격하던 갈퀴는 대가 부러져 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에잇! 그래, 땅 파먹고 사느라 싸움질은 배우지도 못했다. 숫자만 믿고 덤비다 졌다. 됐냐? 괘씸한 우리 두목까지 빨리 추포(追捕)하여 포도청에 넘겨라! 죽기밖에 더 하겠냐?”

성남이에게 밟혀 사족을 못 쓰게 된 자가 오기어린 투지를 불태웠다.



“그래. 너희 말대로, 포도청에 넘긴다. 그리하면 너희는 감히 사도시(司䆃寺) 첨정(僉正)께서 어명을 받들어, 도성으로 부임하고자 행차하시는 길을 막고 강도질을 자행한 죄로 참형(慘刑)을 당하고, 너희 친족들도 연좌(連坐)되어 함께 죽을 것이다. 도망간 너희 두목이 가져간 말과 수레의 값을 몇 배로 쳐서, 너희 친족, 너희 마을 전체가 물어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물어내지 못한다면 너희가 도망나온 마을 사람들 전부 노비가 된다. 그리 되면 너희 마누라와 딸자식이야말로 관기(관가에서 근무하는 기생)가 될지도 모른다."

선대 주상전하께서 공노비를 해방하라 명하시었으나, 이는 한낱 공염불에 그쳤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각 관청은 노동력에 품삯을 지급할 예산이 없었다.

관기로 끌려간다는 말을 듣자, 도적들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요. 나리! 제발 가솔들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아까 임신한 아내의 손을 달랑 잡고, 함께 마을을 나와 도망쳤다던 꺽다리 아저씨가 덜덜 떨며 말했다.



“왜, 아까는 추포하라 그리도 당당하게 말하지 않았느냐!”



단정한 입매에 웃음을 띄우며 그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저 소년 같은 미소일 뿐이었다. 그러나 도적들은 그가 웃음 짓자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더욱 빌며 엎드릴 뿐이었다.



“남의 아내와 여식(딸)을 기생집에 판다 할 때는 그리도 보무가 당당하더니, 이제 네 계집을 관기로 삼는다니까 이리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냐."

미소가 문득 굳었다.
도적들을 제압하기 전 피우던 살기가 다시금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도적들은 이제 단 한 마디도 못 하고, 살기에 눌려 납작 엎드려 벌벌 떨고 있었다.

"실로 너희가 저지른 짓거리는 죽을 죄가 맞다. 마땅히 대명률(大明律; 조선의 형법)에 따라 엄중하게 다스려야 할 것이다!"

숨죽인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검에 맞아 다친 곳에서는 피가,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허나, 아까 첨정 어르신께서 너희에게 인의로 대하시었다. 인이란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쌍히 보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 의란 수오지심(羞惡之心; 그릇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 아니더냐.
하여, 아까 너희가 주제를 모르고 말과 수레를 내놓으라며 설칠 때, 죽이지 않고 상처만 낸 것이었다."

"......"

"너희가 분수에 맞지 않게 강도짓을 하려 든 것은 천 번을 죽어도 씻지 못할 죄이나, 그 과정에 이름에 있어 참작할 여지가 없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첨정 어른께서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아, 오늘 이 자리에서 너희를 죽이거나 포도청에 추포하지 아니하겠다."

"허면......"


"첨정 어르신을 한양까지 모셔라. 그리하면 더 이상 그 어떤 죄도 묻지 않겠다."

그 때였다.
아버지가 끼어드셨다.
“한양에서 우리 집 머슴으로 일하지 않겠는가. 식구들을 데리고 와도 좋네."

“소인들이... 진정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요?”

“마침 손이 부족하던 차였네. 더구나 자네들 두목이 홀로 도망가지 않았는가? 이대로 있다가는, 자네들 식솔은 자네들과 함께 개죽음을 당할 뿐이네.”

“감사합니다! 우리 같은 것들을 머슴 삼아 주신다니, 목숨 바쳐 일하겠습니다!”

부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자신들이 숨겨 놓은 가족들을 데리러 갔다.

성남이 항의했다.

"첨정 어르신! 이것들은 아씨와 마님을 기생집에 팔겠다고 위협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까지 그런 자비를 베푸실 필요가 있습니까!"
도적들을 머슴으로 데려와 한집에서 사는 것까지는 생각지 못했는지, 성남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성남아, 그들이 그렇게 말할 때에, 네가 그들의 두목을 검으로 위협하고 있지 않았느냐? 만약 그 말이 진심이었다면, 아마 두목을 인질로 삼은 너에게 대항하여 아영이나 내 내자(內子; 부인)를 동시에 인질로 삼았을 것이다. 넌 혼자였고, 두목을 붙들고 있어서 행동에 제약이 있지 않았겠느냐. 그러나 실제로 저들은 그리 하지 않았지. 아영이나 내자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가장 어리고 약한 유아나 여인네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비록 도적이라 하나 저들에게 티끌만큼의 사양지심(辭讓之心; 예)과 시비지심(是非之心; 지)이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지. 또 나는 한때나마 영주군과 그 일대를 다스리던 군수로 봉직했으므로, 저들에 대한 책임이 없지 않다."
말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며, 핏기 없는 아버지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이 지역은 '영주'가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는 첨정 어르신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 놈의 책임, 책임! 굳이 제 스승에게 수업료 명목으로 쌀을 내어 주시고, 군포를 내지 못하는 백성을 대신하여 사재 (개인 재산)로 국고를 채워 넣으시니, 안 그래도 점점 줄어들던 전답을, 다 잃으시지 아니하였습니까!"
그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아버지가 희미하게 웃으셨다.

"그런 연유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네 덕으로!
그리고 조상께서 물려주신 전답을 잃은 것은 가산을 잘 관리하지 아니한 내 탓이요, 내 부덕이지. 마땅히 목민관이라면, 백성의 어버이로서 백성을 먹이고 입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성남이 네가 이렇듯 우리 집안을 걱정해주니, 든든하구나! 너를 양자나 사위로 삼았다면 좋았을 것인데, 참으로 아쉽구나."
예학과 보학(성리학의 부계 중심주의 계보학)에 따르면, 같은 성씨 내에서, 항렬이 맞는 친족만을 양자로 삼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사위 삼는 것을 재고하여 주십시오."
상황에 맞지 않게, 이야기가 엇나갔다.
성남이가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어허! 아영이를 구해준 것은 고맙네만, 그것만은 아니 된다. 흠! 흠! 우리 아영이는 장차..."

"아버지!"
내가 소리쳤다.

아버지의 몸이 허물어졌다.

☆ ☆ ☆ ☆ ☆
떡대가 성남이를 공격했던 도끼로,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숲에서 나무를 베어 들것을 만들었다. 나무틀에 천을 잇대어 황급히 만든 것이었으나 아버지의 병세가 위중한 데다 수레마저 없어진 지금, 어쩔 수가 없었다. 모래 섞인 쌀을 환곡으로 받았다는 할아버지는 의외로 손끝이 매웠다. 떡대가 도끼질해온 나무 기둥 두 개와 천으로 빠른 시간 내에 들것을 만들어낸 이가 바로 할아범이었다.

갈퀴를 잡았던 꺽다리아저씨, 도끼로 찍었던 떡대, 죽창을 들었던 할아범, 그리고 낫을 들었지만 한 번도 쓰지 못했던 수염 무성한 아저씨, 이렇게 네 명이 아버지를 눕힌 들것을 메고 걸었다. 성남이는 검을 든 채 행렬의 앞에서 좌우를 살피며 걸었다. 나는 어머니와 어멈과 더불어 맨 뒤에서 걸었다. 말이 끌던 수레에 아버지만 눕힌 것이 아니라, 짐도 실려 있었기 때문에 몸은 가벼웠으나, 두목이 말을 탄 채로 수레를 끌고 도주하여, 앞날이 깜깜했다.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된 것은, 도적들의 식솔들이 함께 따라나서게 되면서, 먹을 것을 조금 가져왔다는 점이다. 도적들 자신은 먹지 않고, 마누라와 자식에게 주기 위해 남겨 두었었나 보다.

얼마나 걸었을까. 해가 졌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 걷자, 산길을 벗어나게 되었다. 도적들의 길 안내가 주효했다. 마을 초입으로 들어섰다. 눈앞에 횃불 여러 개가 보였다.

“나으리들, 바로 이쪽입니다!”

웬 남자가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사내들 한 무리를 이끌고 오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 잘 몰랐는데, 가까워지니 낯이 익었다.

도적들이 우리를 습격하기 직전, 우리를 버리고 가장 먼저 도망쳤던 마부였다.

-제8화에서 계속-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0 03:4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