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이 섬이라 그런지 바다를 참 좋아한다. 아버지의 고향은 섬 속에서도 어촌인 성산이다. 젊은 시절, 할머니는 해녀셨다. 해병대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유전자 덕인지 바다에 살고 바다에 죽었다. 고등학교 때 공부가 유난히도 하기 싫던 날에는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곤 했다. 집에 가면 으레 집과 가까이서 일하시던 아버지가 집에서 논문을 읽고 계셨기 때문에 꾀병 부린 날에는 집에 갈 수 없었다. 학교가 가까웠기 때문에 설사 아버지를 마주치더라도 집에 놓고 온 것이 있다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그랬던 날이면 나는 바다로 향했다.

나의 모교는 바다까지 걸어서 불과 10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위치에 있었다. 비록 뒤를 가로막고 있는 야트막한 산 때문에 바다를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조금 걸으면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점은 그 어느 명문고보다 우월했다. 때로는 땡땡이를 치고, 때로는 야간 자율학습 시간 전에 친구와 함께 바다를 보러 갔다. 어떤 날에는 자율 학습이 끝나던 때까지 넋을 잃고 밤바다를 보았다. 다음 날 담임 선생님께 엉덩이를 각목으로 열다섯 대 맞았지만 후회는 없었다.

고3 수능을 말아먹고 간 곳은 대마도였다. 생각도 안 했던 실패였기에 정말로 죽고 싶었다. 자전거를 타다 올라간 어느 봉우리에서 둥둥 떠있는 작은 섬들과 바다를 보며 마음을 다잡고 재수를 했다.

재수 때는 차마 바다를 보러 갈 수 없어 한강으로 대리만족을 했다. 노량진 앞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은 바다로 향했다. 재수 중간에 있었던 4개월의 묵언수행 동안 바다 대신 강을 보며 한을 삭혔다. 그러다 마음에는 병이 났다. 그때 내가 스스로에게 내린 처방은 바다를 보는 것이었다. 다시 제주도로 내려가 마음껏 바다를 보고 왔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재수를 끝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재수도 망했다. 지지리도 안 풀리는 내 인생. 바다로 갔다. 짠내를 가득 들이마시고 눈물인지 바닷물인지 모를 물을 얼굴에 가득 뒤집어 썼다. 바다에 뛰어들 자신은 없었지만 바다에다가 악다구니를 쏟아부을 자신은 있었다. 바다는 그 날도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 후로 언제나 가슴이 턱 막히고 목이 옥죄어 올 때는 바다를 찾았다. 바다는 내가 무어라 하든 들어주었기에. 뭐라 하는지도 모를 처얼썩거리는 파도로 대답해주었기에.

바다는 늘 한결같은 어머니였다. 잔잔한 날도,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혀 내가 앉아있는 자리까지 튀기던 날도 있었지만 바다를 보러 간 날은 언제나 마음이 편했다. 잔잔한 날이든 파도가 심한 날이든 수평선은 언제나 어머니처럼 한결같았고, 나는 그 수평선을 보며 올곧게 살고 싶다 했다.

오늘 태어나 제일 아름다웠던 바다를 보았다. 고향 제주도의 바다부터 하와이의 바다, 샌프란시스코의 바다, 정동진의 바다, 부산의 바다 등 많은 바다를 보았다. 그러나 그 어떤 바다도 오늘 보았던 바다에 비할 수 없었다.

생-장-피에-드-포흐트를 떠나 어느새 855km 정도를 걸었다. 매일 아침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 지평선을 보고 걷고 지평선으로 지는 해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대서양의 수평선을 보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저 푸른 안개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점점 다가가 바다에 뜬 두 번째 태양을 보고 나서야 정녕 바다인 줄 실감했다.

바다는 잔잔했다. 가만히 넘실댈 뿐 바위에 부딪혀 흰 포말을 남기는 거센 파도는 없었다. 마치 바다 같았지만 바다는 아니었던 미국의 오대호 같았다. 하지만 얼마 걷다보니 익숙한 쇠똥 냄새 대신 익숙하지만은 않은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늘 맡았지만 이제는 낯설어 어색해져버린 냄새다. 냄새는 이윽고 후각에 관련된 기억을 깨웠다. 그리고 나는 고향에 돌아온 듯 더 없이 행복해졌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5 18:0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