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26)> 산티아고 순례길 33일차

먼지, 진흙, 태양과 비
산티아고 가는 길
수천명의 순례자들
그리고 천 년이 넘는 시간

순례자여, 누가 당신을 이곳으로 인도했는가?

누가 당신을 이곳에 오도록 만들었는가?

그것은 별을 비추는 들판도 아니고
거대한 대성당도 아니다
용감한 나바로도 아니며
리오하의 와인도 아니다
갈리시아의 해산물도 아니고
가스띠야의 언덕도 아니다

순례자여, 누가 당신을 이곳으로 인도했는가?
누가 당신을 이곳에 오도록 만들었는가?
그것은 까미노의 사람들이 아니고
시골의 관습도 아니다
역사와 문화도 아니며
깔사다의 수탉도 아니고
가우디의 궁전도 아니며
뽄페라다의 성도 아니다
길을 지나며 그 모든 것을 보았고
그것들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나를 부르는 그 이상의 목소리가 있으니
마음속 깊이 그것을 느낀다
나를 밀어내는 힘
나를 끌어 당기는 힘
내가 그것을 설명 할 수는 없다.
단지 하늘에 계신 그분께서만이 아실 뿐이다.
-신부 에우제니오 가리바이

아기들은 말로 표현을 못할 뿐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잘 안다. 배가 고파 우는 아기에게는 젖병을 물려주면 아기는 울음을 그친다. 아기 돌보기가 어려운 것은 하나의 수단으로 표출되는 그들의 욕구를 세상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을 알아가며 인간은 다양한 욕구를 품게 되고 자신이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헷갈리게 된다. 그러다보면 욕구를 채우려는 우리는 기저귀가 젖어 우는데 젖병을 선사받은 아이처럼 계속 울게 될 뿐이다.

까미노를 걸으며 계속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나는 왜 이 길을 걷는가였다.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이 길을 걷기를 원했다. 이 길 위에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그렇게 8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작년에 비행기표를 끊었을 때는 잠깐 쉬고 오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진로가 크게 뒤흔들리고 나니 뭐라도 얻고 와야겠다는 목표 의식이 생겼다. 적어도 먼저 다녀온 사람들이 그랬다듯이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800km를 걸어 도달한 별들의 평원에 묻힌 보물은 없었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으로 들어설 때 불현듯 터지는 감정도, 한순간에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일도 없었다. 터덜터덜 마지막 40km를 걸어 도달한 그곳에는 나를 반가이 맞아주는 H와 C가 있었을 뿐이다. 사실 걸어오며 매일 마주치는 풍경과 생각들 그 자체로 만족했기 때문에 큰 기대는 없었다. 그래도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800km를 걸어 도달한 길인데 담담하게 눈물 한 방울 안 나는 것은 너무하다 싶었다.

충분히 힘들지 않아서 그랬나. 감사하게도 내 발은 하루에 길면 50km를 걷는 강행군에도 물집 하나 잡히지 않았다. 제일 걱정이었던 발목은 며칠 쉬고 천천히 걷는 동안 씻은 듯 나았다. 하나씩 버리면서 걷자는 취지로 싼 15kg짜리 배낭은 무게가 줄어들기는커녕 도중에 17kg로 무게가 늘었다. 힘들긴 했어도 죽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만일 죽을만큼 힘들었으면 펑펑 울었을까.

산티아고에 도착하자 여태 쌓였던 긴장이 풀리면서 여태 겪지 않았던 피로가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도착한 다음 날 열이 오르며 몸살이 났다. 밥만 먹고 나머지 시간에는 숙소에 죽은듯 누워있었다. 그 다음 날에는 열이 조금 내렸지만 뭔가를 잘못 먹은 듯 위염과 장염에 동시에 걸렸다. 활활 타는 몸뚱아리와 그 속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오장육부를 이끌고 미사를 참례했다. 미사에서 오랜만에 만난 길동무들과 어쩔 수 없이 가벼운 점심을 하자 저녁때는 저승 문고리를 잠깐 만지고 온 착각이 들만큼 아팠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 방에 누워 쉬었다. 사실 수 십 분 간격으로 한 번씩 화장실에 가주어야 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물통을 하나 옆에 끼고 누워 쉬었다. 인간의 몸이 간사한게 엊저녁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그 와중에 배가 고프다. 입맛은 없었지만 배가 고파 뭐라도 쑤셔 넣고 싶었다.

누워 있으며 이때 먹고 싶은 음식은 과연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고민을 했다. 나는 지금 음식을 원하지만 사실은 내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심지어 몸이 원한다고 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부모님이 되려면 꽤 현명해야 한다. 마트 과자 코너 앞에서 이성을 잃는 아이를 잘 타일러야 하기도 하고 불어난 물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싶어 하는 아이를 끌고 들어오는 엄함도 때로는 필요하다. 이것은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서른 여 일간 길을 걸으며 스스로 아이같이 단순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나는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내 스스로가 무언가를 찾아내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몰랐다. 그것이 내 자신의 본모습이든지 무욕의 상태이든지 막연히 찾으면 좋을 것이라고 상상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까미노는 내가 그것들을 찾고 있는 동안 적재적소에서 더욱 큰 것들을 때로는 무지개로, 때로는 안개에 묻힌 산골 마을로, 일출로, 일몰로, 밤하늘로, 사람들로 안겨주었다. 어린 아이 같던 나는 길을 걸으며 덕분에 더없이 행복하고는 막상 도착한 다음 얻은 것이 없다는 생각에 화를 냈다.

우리는 너무나 복잡해서 많은 것을 원하면서도 정작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답이라 생각되는 것을 찾아 맹목적으로 질주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두기 포기한 곳에서 빛을 내고 있을 수도 있다.

조금 더 단순해지고 작아지고자 한다. 건강이 괜찮다면(세 시간에 한 번 이상 화장실을 가지 않고 감히 뭔가를 먹어도 속이 괜찮다면) 내일은 다시 400km를 새로 시작해 걷게 될 것이다. 더 천천히, 보이는 대로 느끼며, 잠시 벤치에 누워 하늘도 즐기는 여유를 갖고 걸으련다. 내가 단순해져도 결국 내가 돌아갈 사회는 복잡하다. 배경마저 단순한 이 길을 기회가 있을 때 충분히 걸으며 마음속에 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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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길의 끝이긴 하지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외전처럼 바다로 이어지는 또 다른 길을 걸으면서 쓴 글들과 나머지 유럽여행을 하며 쓴 글들이 아직 남았습니다. 아직 여행기는 끝이 아닙니다! 계속 읽어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5 05:1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