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5)> L’aube de Bayonne

웃음·연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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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등록일 : 2019-03-23 12:35:37 | 글번호 : 188518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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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보니 오늘도 새벽 3시 53분이다. 온 지 거의 일 주일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시차적응이 힘들다. 새벽 3시 53분. 한국에서는 아예 꼴딱 밤을 새는 경우가 아닌 이상 깨어있기 힘든 시간이다. 하지만 일찍 잔 덕에 몸은 피곤하지 않았다. 옆방에서 주인 부부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방음은 이곳에서도 완벽하지 않다. 평소 코골이가 심한 터라 전날 나 때문에 잠을 설쳤을 것이 분명한 주인 부부에게 괜스레 미안했다. 이제야 찾았을 그들의 안식을 방해하지 않고 싶어 서둘러서 조용히 짐을 챙기고 나왔다. 새벽 5시 30분. 길가에는 아직 아무도 없다. 어제 바욘 역에서 숙소까지 걸어오며 건너왔던 아두흐 강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손에는 아침을 때울 바게뜨 샌드위치가 들려있다.

나는 새벽 도시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새벽에 깨어나는 도시는 분명 낮에도 존재했겠지만 볼 수 없었던 도시의 면모를 보여준다. 사람의 그런 모습도 새벽에 나타난다. 아무런 화장기 없이, 좋은 옷도, 왁스나 헤어스프레이도 없이 부스스한 모습. 그것이 원초적 인간들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매일 잘 꾸민 애인의 모습만 보다 처음으로 함께 밤을 보내게 되고 보는 모습 같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나는 그러한 본연의 순수함을 사랑한다.

강은 숙소를 기준하여 북쪽에 있다. 바욘 시내 전체를 지나가는 강이니 구글 지도도 없이 무조건 북쪽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걸었다.새벽길에는 고양이들과 가로등, 그리고 나만이 존재한다. 호젓한 이 짧은 여정에 굳이 핸드폰을 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앞으로 걸을 산티아고 순례길도 이렇겠지. 하늘, 나, 그리고 길만이 존재하는 여정. 아직 길을 걷기 시작하지 않아서 그런지 일 평균 25km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크게 와닿지 않는다. 행군하던 군대의 추억은 옅어진 지 오래이다. 그저 낭만적일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40분쯤 걸었을까. 승객이 없는 버스 한 대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버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은 승객이다. 고로 텅 빈 버스는 지구에 아무 의미 없이 탄소를 흩뿌릴 뿐이다. 하지만 어디엔가 있을 의미를 찾기 위해 버스는 오늘 새벽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인생에서 굳이 의미를 찾기 위해 발버둥질할 필요가 없다는 반항적인 생각을 했다. 죽지 않는 이상 우리는 빈 버스처럼 달려갈 것이고 적어도 한 정류장에서는 손님이 올라타게 되겠지. 하지만 공터에 덩그러니 서 있는 버스에 손님이 올라탈 리 없듯 우리는 적어도 달려야 한다. 나 역시도 쉴 새 없이 달리다보니 어느덧 이 곳 바욘까지 오게 되었고 바욘의 새벽을 달리다보니 아두흐 강에 다다랐다. 오늘 새벽 기행의 목적지이다.

새벽 6시 16분. 앉을만한 벤치를 찾았지만 어제 내린 비로 인해 젖어있었다. 가방에 비닐봉지를 쟁여둔 것이 다행이었다. 비닐봉지를 꺼내 벤치에 앉아 강 건너편의 또 다른 바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는 맞은편의 낮고 긴 아파트 하나와 마주하게 되었다. 뒤로는 루르드에서의 단잠을 방해했던 나이팅게일의 노래가 들렸다. 루르드가 남겼던 인상이 워낙 좋았던 터라 새삼스레 반가웠다.

도시가 깨어나는 것을 보려면 아파트를 바라보는 것 만한 일이 없다. 아파트의 꺼진 불이 하나 둘 씩 들어올 때 도시는 뒤척이며 잠을 깨기 시작한다. 한국보다 해가 늦게 뜨는 만큼이나 유럽의 도시는 늦게 일어난다. 그러나 이미 몇 채에는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이 보인다. 이를 필두로 하나 둘 씩 불이 들어오고 금세 어두웠던 아파트가 환해진다. 아파트가 환해지는 것을 바라보는 동안 아무도 없었던 내 앞으로도 조깅하는 부지런한 사람들과 자전거 몇 대가 지나간다. 이들 역시 아침에 만난 버스 기사처럼 도시의 잠을 깨우는 사람들일 것이다.

동쪽 하늘도 슬슬 푸른 기를 머금기 시작한다. 이대로 일출을 보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해가 뜨는 듯 하더니 이윽고 천둥이 울리며 빗방울이 톡톡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안타깝게도 우산은 없다. 한 후배는 유럽에서 내리는 비를 맞아주는 것이 낭만이랬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그러한 호사를 누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정열적인 키스를 나눌 수 있는 연인이 있다면 모를까, 외로운 여행자는 부지런한 주인이 운영하는 카페든, 슈퍼마켓이든, 그 어디로든 들어가야만 한다. 서둘러 자리를 떴다.

강변에서 시내로 접어들자 멀리서 성당 종이 여덟 번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8시 정각이다. 시내 입구에는 시외버스 승차장이 있었다. 승차장 옆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캐리어를 세워두고 담배를 태운다. 몇몇은 근처 카페 옥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침부터 와인 한 잔을 곁들인 대화를 나누고, 몇몇은 커피잔을 들었다. 그들 옆에 홀로 앉아 프랑스인처럼 모닝 와인을 즐겨볼까도 했지만 나는 간만에 성당으로 향해 아침 미사를 참례하기로 한다. 성당으로 향하는 길, 잠자던 건물들에서는 화장을 하고 옷을 갖춰입고 왁스를 바른 사람들이 드디어 줄지어 나온다. 고요하던 도시는 어느 새 각종 자동차의 엔진 소리, 말소리, 클락션 소리 등으로 시끌시끌하다. 아. 도시가 깨어났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3 22:3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