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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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주소임당)

그녀가 요리해준 파스타와 감바스를 같이 먹었다는 것 말고는 그냥 여느 때의 밤이었다. 밥을 다 먹고 우린 같이 잤다. 지친 우린 바로 잠을 청했고 나는 좀 일찍 일어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녀에게 잘자라고 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일어나니 역시나 그녀에게 카톡이 와있었다. 왜 먼저 가냐고 귀엽게 투덜대는 카톡이였다. 이제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차단을 하느냐 마느냐. 사실 선택의 기로고 자시고도 없이 차단을 했던 것이 과거의 나였지만 조금 다른 상황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자신의 매력을 어필할 시간을 너무 많이 줬다. 밥을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데이트를 한 것이다. 지금까지 여자들과는 항상 술먹으면서 얘기를 하다 자고 아침에 헤어지는게 끝이었는데, 데이트를 한 것이다. 그리고 분위기 있는 곳을 가서 먹는 것 이상으로 여자의 집에서 단란하게 와인과 음식을 먹은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그녀가 귀엽고, 요리를 잘하고, 쾌활하고 여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연애관계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어필했던 것이다.

아무리 차갑게 행동하는 나라도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보다 이쁘고 화려한 사람은 많이 만나봤지만 이 친구와 보냈던 시간만큼 같이 보낸 여자는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매력을 어필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나는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미 첫 날의 악몽에 대한 기억은 귀찮았던 기억보단 귀여움과 보호 본능을 이끌었고, 맛있던 요리와 조심히 나에게 안겼던 기억들은 나를 사로잡았다. 보통 다른 여자들과는 서서 잤다고 묘사해도 괜찮을 것이다. 보통 그 사람들과는 거의 방문을 열기도 전이나 열자마자 서서 안고 애무를 했고, 그러다 자연히 눕게 되었다. 뭐 과정으로 말하자면 서있다가 바로 누웠던 것인데, 이 여자와는 같이 밥을 먹었으니, 집에 식탁이 없었으니 앉아 같이 이야기하다 내 옆에 와서 나에게 자연스럽게 안기는 그런 전개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앉았다가 누웠던 것이다. 물론 다시 일어섰지만 말이다.

이게 얼마나 나에게 큰 차이를 주었는지 모른다. 정말 나도 모른다. 왜일까, 하지만 그것은 나를 많이 흔들어 놓았다. 나는 차단도 답장도 하지 않은 채 얼굴을 감싸쥐고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남은 하루를 그녀의 생각에서 벗어나려 다른 일에 집중을 하며 보냈다.

다음 날 아침에도 그녀에게서 연락이 와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결국은 잠수를 탄거나 다름 없으니 처음엔 왜 연락이 없냐는 식이다가 그 후엔 화내다가 그리고 걱정을 하는 기분의 곡선이 메시지에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전화 통화까지 몇 통 남아있었다. 아침부터 현실에 부닥뜨린 나는 일단 샤워를 하기로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옷가지를 챙기고 물을 틀며 나는 따뜻한 물을 몸에 뿌렸다. 생각을 말끔히 하기 위해 샤워를 한 것인데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샴푸와 바디 샴푸로 몸을 닦지도 않고 물을 맞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에 잠긴 것은 아니고 나의 요 몇 년을 돌아보게 됐다.

어릴 때부터 여자랑 자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먼저 접근을 하는 여자도 많았고 내가 접근을 하면 꽤 높은 확률로 나를 좋아하게 되니까 말이다. 호감을 사랑으로, 아니면 호감에서 욕구로 만드는 것은 꽤나 어렵다고 생각되어지지만 마냥 그렇지도 않았다. 보통의 진행 방향은 아무래도 호감에서 사랑 그 후 욕구이겠지만 나는 여자의 감정 이동을 호감에서 욕구로 직행해야하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는 잘몰랐지만 나는 후자에 좀 더 최적화된 남자상이지 않나 싶다. 사실 뭐 몸매가 좋거나 연예인처럼 잘생기진 않았다. 뭐 내가 내세울 거라면 나는 분위기를 잘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구안이 좋다는 것도 있다. 내 여성 편력이 나를 나쁜 남자 식으로 여자를 유혹하는 것이라고 많이 오해하는데 나는 오히려 모성애 자극으로 여자를 다가오게 하는 성격이다. 필요할 때 손 잡고, 필요할 때 안고, 필요할 때 말을 놓고 이런 타이밍을 잘 안달까. 그러니까, 분위기를 만드는 재주가 있달까.

이와 관련되서 재밌는 일화가 있다. 어떤 처음 만난 누나와 그 날밤을 보내려고 할 작정이었는다. 나는 술을 먹으며 대충 적절할 때 말을 놨다. 나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녀는 별 반응 없이 듣고 말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말을 끊고선, “넌 근데 언제부터 반말이니?”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때 깨달았다. 이 누난 나에게 넘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연은 이렇다. 내가 만난 이성의 대부분이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거기다가 처음 만나니 나는 당연 존댓말을 하였다. 물론 그건 누나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내가 적당한 시점에서 말을 놓을 때, 누나들은 항상 바로 반말하네? 이러진 않았다. 보통 얘기를 진행하다 내가 담배를 피러 나갔다 왔을 때 그러는 식이였다. 그리고 그 멘트, “넌 근데 언제부터 반말이니?”를 나는 열 손가락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들어왔다. 이 때 그걸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랬던 누나들은 거의 대부분 나와 같이 누워줬다.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하는 SNS에서 나를 먼저 만나고 싶다 말한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SNS 친구이다 보니 그 사람의 일상을 조금 알았고 사진들로 일면식 아닌 일면식이 존재한 사람이었다. 나는 꽤 괜찮은 비스트로에서 저녁을 샀고 같이 술을 먹기로 했다. 보통 내가 자왔던 아예 모르는 사람이 아닌 이 여자는 나를 좋아했더랬다. 말했듯이 나는 이 사람을 조금 알아서 무슨 일은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날은 조금 이상한 날로, 내가 술이 조금 취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댔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그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라고 대답했고 “이렇게가 뭐야?”라는 내 대답에 “넌 너무 유혹적이야.”라고 다시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가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하였고, 그냥 오랫동안 넷상에서 좋아했던 나를 한번 보고 정리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내가 형성한 그 술집의 공기는 그녀의 바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자명히 느끼게 해줬고 나는 그녀와 잤다. 그 동안 잤던 많은 여자들 중에서 남친이 있는 여자가 적지 않을 거라는 것은 뻔하지만 알고 잔 일은 별로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괜찮겠어?” 라고 물었고 그녀는 “너는?” 이라고 물었다. 그리고 우린 아침이 돼서야 헤어졌다. 그리고 원래도 적은 내 SNS 친구의 수는 하나가 더 줄었다.

그러니까 샤워를 하며 이따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쓰잘데기 없는 생각들. 샤워를 끝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나는 지금의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그랬듯 내 옆자리로 와서 나에게 몸을 기대는 그녀의 모습이 내 눈에 선했다. 분명 뭔가가 달라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물론 내 이 생활에서 이런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또 온 것이다. 나는 화장실에서 나오며 좋지 않다며 머리를 내저었다. 머리를 말리고 난 후 배가 고팠다. 사람이란 간사해서 원래 변명거리가 생기면 하고 싶지만 하기 꺼려지는 것을 쉽게 하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변명거리를 만드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배가 고프다는 걸 핑계로 그녀를 만나려는 것이다. 당연히 집에서 먹으면 될 것을 나는 “맞어, 걔가 감바스 하나는 진짜 잘만들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나는 늦게 답장해서 미안하다고 어제는 하루 종일 일이 많았다 카톡했다. 그녀는 예 그렇듯 빠른 답장으로 걱정했다고 보고싶다고 카톡을 계속 보내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카톡을 이어가며 오늘 밤도 감바스를 해줄 순 없냐고 물어봤다. 카톡을 기다리며 나는 조금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런 내 모습이 조금 한심하고 웃기다고 생각되어 난 미소를 지었다. 문자가 한동안 안오다가, 갑자기 카톡에 지도가, 위치 정보가 떴다. 클릭해보니 동부이촌동에 있는 어떤 술집이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스페인 비스트로인데, 오늘은 자신이 여기서 사겠다고 만나자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3일 연속으로 그녀를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원래 그럴 작정으로 말했지만 또 데이트를 하게 되니 맘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배는 고프고 그녀는 보고싶으니 나는 알겠다고 하고 옷을 입었다.

“백수끼리 잘 만났네.” 라고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 대책 없는 휴학을 하고 있고, 그녀는 졸업 후 대책 없는 휴식 기간을 가지고 있다. 이러다 매일 보는 것은 아닐지 걱정 아닌 걱정이 들었다. 택시를 잡아 타고 이어폰을 끼고 가만히 노래를 들으며 약속 장소로 갔다. 그녀는 조금 늦는다 말했고 역시나 내가 먼저 도착했다. 약속 시간보다도 조금 이르게.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를 부여잡으며 나는 그녀가 빨리 오길 바랬다. 나는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여 점점 짜증이 나는데, 멀리서 눈에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그 즉시 내 심장은 두근댔고 설레는 이 마음을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앞이 깜깜해졌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17 04:2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