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고백할 게 하나 있어.



왜 내 입에서 고백이란 말이 나오니까 웃는 건데? 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선 감추고 싶은 부분이 있는 마음 여린 여자야. 사람들은 가끔 내가 다른 여자들 같은 모습을 보이면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이더라. 저번에 내가 길거리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는 얘기를 했을 때도 그래. 아니,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서 내가 뭘 말하려고 했지? 그래. 그 날 모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 모임은 조금 특별했어. 내가 있었던 모임들이라고 해봐야 뭐, 가치투자 모임, 경영전략학회 같은 속물 같은 부류긴 하지만, 그 동안 내가 봤던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많이 봤달까? 그 나이대의 남자들 잘 알잖아. 다들 자기 밥그릇 보전하려고 자기들끼리 위아래 보이지 않는 계층을 만드는 남자들. 물론 남자로써는 그런 부분도 조금 있어야 하긴 해. 근데, 그 옆의 여자들은 뭔가 소외당하는 느낌이 든달까. 오빠야 남자니까 잘 모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 모임에서는 그런 정치가 별로 안보였어. 다들 나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인데도 내 대학 동기들보다 더 순수한 것 같더라. 오빠. 내 대학 동기들 다 알잖아. 그래 부잣집 외동 같은 애들. 자기들이 대한민국에서 뭔가 특별하기라도 한 줄 알고 특권의식에 쌓여있는 애들 말야. 물론 나도 그런 모습이 조금 있을 지도 모르겠네. 친구란 같이 다니다 보면 모르는 새에 서로 비슷해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런 모습이 내게 있다고 누군가 내게 말하면 난 그 버릇과 행동을 단번에 던져버릴 테야. 난 그런 사람들 싫거든.

누가 고시에 패스하면 그날부터 잘보이려고 애를 쓰는 애들. 속물이라고? 난 대학 새내기 때부터 그런 속물들을 봐왔어. 고시 패스한 사람에겐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고, 7급,9급공무원에게는 경멸과 조소를 보내는 갓 20살 먹은 아이들이 상상이 가? 그 나이엔 원래, 소설을 읽고 아름다운 꿈과 낭만에 젖어야 하는 거 아니냐구. 대학 하면 사람들은 캠퍼스의 아름다움과 낭만을 생각하잖아. 근데, 난 매일 학교에 갈 때마다 전쟁터에 가는 기분으로 나섰어. 옷도 집에서 가장 깔끔하고 예쁜 옷만 입고 갔지. 지기 싫었거든. 무시당하기도 싫고. 그래서 밝은 척을 했어. 밝게 웃으면서 애들한테 먼저 말 걸고. 그래. 여자들이 그러는 거 다 가식이야. 오빠 몰랐지?

아무튼 고백할 게 뭐냐고? 오빠 성격 진짜 급하다. 알았어. 딱 5분, 아니다. 2분만 좀 기다려봐. 이거 다 스마트폰의 폐해라니까. 내가 고백할 건, 그 날 내가 심각한 갈등에 빠져 있었다는 거야. 그동안 나 글 쓰고 싶어했잖아. 오빠도 알다시피. 고등학교 때 수능공부를 할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였을 지도 몰라. 여튼 어느 때부턴가 내 꿈은 작가였어. 근데, 그게 뭐가 문제냐구? 하아. 오빠. 작가는 쉬운 길이라고 생각해?

만약 내가 그냥 이 길 위에서 기존의 노선대로 따라가다 보면, 내 미래는 아마. 나쁘지 않을 거야. 지금이야 취준생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딘가엔 취직해서 그 피라미드 속에서 꿋꿋이 버텨내면서 살아가겠지. 뭐, 오빠도 그래서 나랑 사귀는 거 아냐? 아야. 알겠어. 장난이야. 아무튼 이 길 그대로 따라가다보면, 부모님도 행복할 거고, 내 주변 사람들도 행복할 거야. 내가 문제지.

이 길로 가는 건 순전한 내 의지가 아니거든. 내가 대학에 간 거? 그거 다 작가가 되려고 그런 거였어. 김영하, 공지영 봐봐. 한국 문학계에 한 획을 긋고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은 작가들은 모두 명문대 출신이거든. 그 사람들의 전철을 밟고 싶었달까. 그치. 지금으로 치면 내 인생의 모토였던 셈이지. 그리고 일단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부모님이 내 인생에서 더 이상 신경 안 쓸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아니더라. 오빠 주식 좋아하니까 잘 알 거야. 주식이, 그래 아모레퍼시픽이 몇 년 동안 계속 상한가였잖아. 5년 7년 계속 상한가였던 아모레퍼시픽을 보면서 오빠는 무슨 생각이 들었어? 그게 떨어질 거란 생각 조금이라도 들었니? 아니지.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아모레퍼시픽은 계속 오르기만 할 거라 생각하지. 그리고 계속 더 많은 기대를 할거야. 그리고 점점 더 많은 돈을 투자하겠지. 계속 더 많이. 또다시. 내가 딱 아모레퍼시픽이야.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올려 놓고, 갑자기 어느 날 하한가로 돌변하는 거야. 그 상황에서 그 주식 지분을 가진 주주들은 어떤 기분일까. 처음엔 당황하지 그래도 다시 오를 거라는 확신을 놓치진 않아. 그러다 그 다음 날도 하한가, 또 다음 날도 하한가. 계속 내려가면? 그 때부터는 주식에 화가 나는 거야. 자기가 투자한 시간과 비용 마음 모든 걸 후회하면서. 그래. 오빠도 알다시피 우리 부모님이 내 대주주야. 근데, 진짜 중요한 건, 주식의 대주주들은 그 주식을 바로 팔아버리면 돼. 하지만, 부모님은 그렇게 못하지. 마음 아프지만. 자기 자식을 팔 수는 없지 않겠어. 아, 물론 결혼이란 이름으로 자식을 팔아버릴 수는 있긴 하지만, 우리 부모님이 그 정도로 대범한 분들은 아니셔서 말야.



그래. 내가 고백할 건, 그 날 난 면접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단 거야. 아직 남은 회사가 있냐구? 응 있지. 이 회사가 좀 그래. 대기업이긴 한데, 과거엔 화려했고 요즘엔 추락하고 있는 회사랄까. 물론, 좋은 회사긴 하지. 내 핸드폰이 이 회사 제품인데, 요즘 잘 나가는 애플과 삼성에 비해 발열현상이 심하더라구. 왜 사람들이 이 회사에 등을 돌리는 지 알 것 같더라. 회사 자체가 좀 느긋해서 그런지 일처리도 늦구. 메르스 때문에 면접을 한 주 뒤에 본 것도 이유가 되겠지. 아무튼 난 그날 그 회사 면접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어.

결과를 말하라구? 오빤 왜 항상 결론을 도출하려고 하는 거지? 항상 그런 식이야. 열심히 무언가 내가 이야기하고 있으면, 그 전에 결론을 이야기하라고 해. 오늘은 나도 그냥은 이야기하지 않을 테야. 뭐, 중간에 일어나 보라지. 그래도 오빤 몇 걸음도 못 가서 다시 돌아오게 될 걸. 결말이 궁금할 게 확실하거든.

그 날 소설에 관한 정모는 흥미로웠어.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처음 쓰는 과정부터 지켜보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잖아. 글을 체계적으로 쓰고 계신 분들도 보이고, 기발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도 많아서 자극이 많이 됐어. 그리고, 자기 글에 대한 애착이랄까. 자기가 창조한 세계에 대한 애정이 엿보여서, 좋았어. 물론 오빠가 이걸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 안했어. 그런데, 벌써부터 그렇게 딴 델 쳐다보면 어떡하라는 거야.

무튼 길고 긴 정모가 1시간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가람오빠의 통솔 아래 그 뒤엔 계속 뒤풀이가 이어졌어. 그리고 나는 점점 초조해졌지. 그 날 내 앞, 혹은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라면 쿵쾅쿵쾅 뛰는 내 심장소리가 들렸을 지도 모르겠어. 발표 시간이 다가오기 전엔 항상 이래. 그렇게 가고 싶은 회사가 아니더라도, 꼭 이렇더라. 실패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아서인가. 어떤 회사든지 나를 거절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안감을 조성해. 발표시간인 8시가 가까워오자 심장은 더 빨리 뛰기 시작했어. 옆에 있던 오빠에게 영화계 관련 이야기를 듣고, 연주 언니에게 학원 관련 이야기를 들어도 마음이 잠잠해지지를 않는 거야. 손에 식은 땀이 계속 나는데, 아, 오빠가 그 때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정확히 8시가 되자. 나는 화장실로 갔어. 그 땐, 우리가 이미 2차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지. 왜 그 자리에서 바로 확인해보지 않았냐구? 오빤. 의사니까 취업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는데, 회사에 떨어졌다는 메시지를 보면 내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를 알 수 없거든. 많은 경험상 나는 그런 메시지를 받으면 그 자리에 앉아 눈물이 났어. 이건 여자가 아닌 남자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거야.

헌데 이 늑장꾸러기 회사는 8시에서 5분 가량이 지난 시간에도 결과 발표를 올리지 않는 거야. 그 때,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어. 결과 발표가 늦어질 것 같다는 찌라시의 복사문과 함께. 그 친구도 같이 그 날 면접을 봤었거든. 그래. 지현이 말야. 키 작고 단발머리. 그렇게 나는 실망을 안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어.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핸드폰을 확인하고 결과를 보고 싶은 충동을 가라앉히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했지.

내가 자리로 돌아갔을 땐, 옆에서 호찬오빠가 일본에서 사온 작은 인형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어. 사실 처음엔 별 관심이 없었지. 근데, 컵에 매달리는 인형을 보니까. 너무 가지고 싶은 거야. 그 때 내가 받은 고양이는 컵에 매달려있을 수 있는 게 아니었거든. 그냥 장식용 고양이였어. 그걸 보는데, 예쁘고 너무 좋은데, 실용성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잖아. 스펙도 좋고 다 갖췄는데, 실질적으론 회사에 도움이 안 되는 나처럼 말야.

그래서 옆에 있던 제민오빠가 갖고 있는 고양이와 억지로 바꿨어. 이름에서 ‘제’를 사람들이 ‘재’라고 오해를 많이 한다는 오빠가 컵에 끼울 수 있는 인형을 가지고 있었거든. 오빠는 많이 당황했을 거야. 이 자리를 빌어. 사과해야지. 알다시피 ,뭐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나 무척 단순해지잖아.

사실 그러다 면접 발표에 대해 잠깐 잊어버리기도 했어. 지금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인지 그 때의 기억이 뚜렷하진 않다. 리연오빠와 예쁜 체현언니가 술을 열심히 마시고, 그 분위기에 점점 술자리가 달아올랐던 걸로 기억해. 그러다 우리 테이블 사람들도 점점 술이 오르고. 나? 오빠. 알잖아. 나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선 술 잘 안 마시는 거. 그래. 이상한 주사가 나올까봐. 처음 보는 사람들 멱살을 잡을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러다. 지현이한테 다시 카톡이 온 거야.

오빠. 사람의 운명이라는 거 믿어?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난 운명이 있다고 믿거든. 뭐, 단순히 남녀관계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건 아냐. 그거야말로 난 터무니없는 거라 생각해. 대신, 우리 삶을 둘러싼 운명 말이야. 마치 하늘의 별자리들이 우리의 삶을 안내한다는 식의 운명. 그래. 난 사람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어떤 미지의 힘을 믿어. 우리는 당시엔 그 순간이 ‘운명’이라는 것을 쉽게 느끼지 못하고 지나치지만, 수만 가지의 시간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고 나면, 깨닫는거야. 그 순간이 내 삶의 가장 큰 변곡점이었단 걸.

근데, 내가 그 순간 어떤 운명적인 감각을 느꼈다면, 오빠 믿을 수 있니. 내가 육감이 좀 발달했잖아. 재수없다고? 들어봐. 오빠. 그냥 하는 말 아니니까. 그래. 내가 예를 하나 들어볼게. 예전에 내가 중학생 때인가. ‘프라하의 연인’이라고 전도연 나오는 드라마가 있었어. 내가 그 드라마 매주 꼭 챙겨봤거든.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라서? 아니야. 난 그 때, 김은숙 작가가 누군지 몰랐어. 그리고 더 웃긴 건 주연배우도 전도연 말고는 기억도 잘 안나. 아마도 김주혁이 남자주인공이었던 것 같아. 오빠. 김주혁 모르지. 맞다. 1박2일에서 요즘 웃기게 나오는 배우. 아, 방자전. 그래 바로 아는구나. 하여간 남자들이란. 무튼, 난 그 드라마 팬이었어. 그 드라마에 하정우가 나왔거든. 몰랐지 오빠. 그 사람이 어떤 배역이었는지 알면 더 까무라칠 걸. 전도연 운전기사로 나왔었어. 한 회에 대사 한 번 칠까 말까한 배역. 근데, 나는 그 작은 배역의 남자에게 필이 꽂힌 거야. 그래서 당시 네이버에 하정우를 검색해보기도 했지. 나오는 자료는 딱 하나였어. 하정우의 첫번째 인터뷰 기사. 아마 하정우를 인터넷에서 찾은 유일한 사람이 나였을걸.

그래. 그 때 느낌이 왔어. 이사람 뭔가 만만치 않구나. 갓 초등학교를 벗어난 어린애가 할 생각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아니야. 그런 건 보면 딱 느낌이 와. 근데, 그 때와 같이 뭔가가 내 몸을 쓸고 지나가는 느낌이 드는 거야. 지현이에게 문자가 오던 그 순간.

내가 곧바로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는 무렵, 내 등뒤에선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만화주제가가 흘러나왔어.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거야. 그게 누구였는지는 사실 기억은 안 나. 노래 제목도 내가 모르는 거였어. 그래도 그 노래를 들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던 건 확실해. 그래. 그 노래가 내게 이상한 힘을 줬어. 노래 얘기는 조금 있다 다시 할게.

화장실 문을 닫고 들어갔어. 그리고 내가 할 일은 간단했지. 다시 한번 로그인을 하고 들어가는 거야. 그 순간 내 가슴은 다시 뛰었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충분히 내게 증명할 만큼 심장이 뛰더라. 쿵쾅쿵쾅. 거짓말 안하고,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온 화장실을 울렸다니까. 로그인을 했어. 그리고 조심스레. 게시판의 문을 열었지. 쿵쾅쿵쾅. 그리고 그 문이 반짝. 열리는 순간. 심장은 일순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어.

아, 오빠. 나 잠시 목 좀 축여도 될까. 다시 또 그 때의 긴장이 느껴지네.

미안. 내가 결정적인 순간엔 꼭 이래.

그래. 오빠. 오빠도 지금 내 표정을 보고 눈치챘겠지만, 결과는 또 다음기회에였어. 내가 울었냐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여기서부터야. 이상하지. 전혀 눈물이 나지 않았어. 오히려 내 귓가엔 뭐가 들렸는지 알아? 그 노래 소리. 제목도 모르는 만화주제가가 들려오는 거야. 다만 소리가 좀더 커져 있었어. 다른 목소리가 여럿 가미되어 있었지. 누군가 이런 표현을 썼었는데, 사형선고를 받는 순간에도 사람은 재판관의 얼굴에서 사마귀를 발견하는 법이라고.

노래 소리를 들으며 나는 홀린 듯 화장실을 나왔어. 오빠. 어릴 적 만화주제가들 기억 나니. 가만 보면 우리 마음 속엔 어릴 적 보던 만화주제가가 숨겨져 있어. 다만 우리는 평소에 그 노래들을 풀어내지 않고 꽁꽁 싸매서 가슴 한 켠에 묻어두었지. 까먹고 잊어버린 게 아니야. 다만 어른이 되면서 가슴 한 켠에 가만히 묻어두고 있을 뿐이야. 마치 결혼 안 한 커리어우먼이 자신의 여성성을 잘 숨겨둔 것처럼 말이지. 우리가 어른이라 할 수 있을까. 난 아직도 상처받으면 한참을 상처를 부둥켜안고 침대에 앉아 눈물짓는데, 아직도 가슴 속에서는 신데렐라와 해리포터에 열광하는데, 나 확실히 어른 맞는 건가.

오빠도 마찬가지야. 오빠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 있잖아.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오빠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말을 듣고 나는 꽤 충격을 받았어. 이 사람은 어른이구나. 느꼈달까. 어른들은 꼭 뭐든지 다 단정짓잖아. 자기가 아는 게 진리라는 듯이. 부모님들의 그런 단정에 내가 많이 속아오긴 했지. 공부 안 하면 굶어죽는다. 대학 못 가면 사람도 아니다. 등등.

근데, 오빠. 내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오빠도 우리도, 그리고 부모님들도 아직 어른이 되려면 먼 것 같아. 어른이란 세상에 예외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거거든. 내가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겸허해지는 것. 그게 어른인 것 같아. 오빠.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아는 노래도 나왔어. 천사소녀 네티의 주제가였지. 진한오빠가 불렀던 것 같아. 긴 머리 높이 묶고 행복을 나눠주는 네티 말야. 나는 내심 포켓몬스터 주제가도 나오기를 원했는데, 아무래도 연령대가 맞지 않아서인가 다들 꺼내지 않더라구.

네티의 주제가를 듣던 나는 또 깨달았어. 내가 내 마음 속의 나를 억눌러왔다는 걸. 어린 시절의 나를 지워버리고 억누르려 애를 쓰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어. 난 항상 어른이 되려 했거든. 뭐든지 완벽한 어른이라는 추상적인 개념 말이야. 어른은 다 완벽한 건 줄 알았어. 화가 나도 금방 잊어버리고, 슬퍼도 바로 털어버리고 그런 줄로만 알았어. 어린 건 무조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어서 피터팬도 싫어했지. 걘 어른이 되려고 안 하잖아. 피터팬을 좋아하면 나도 어른이 되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누구보다 이상적인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내 길을 가로막을 거라 여겼었지. 그래서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깔끔하게 봉인해서 상자 속에 넣어두었어. 근데, 그 만화 주제가가 그 봉인된 상자 뚜껑을 힘껏 밀어 젖힌 거야.

그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뭐였을까. 확실해. 자유였어. 자유로움. 그게 맞는 것 같아. 내가 자유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지만, 그건 자유로움이 확실했어. 그리고 그 영향으로 지금 내 몸과 마음.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보이지 않아? 어린 내가 풀려난 거야.오빠. 어릴 적 사회에서 원하는 어른이 되려고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나타난 거지. 온갖 시험성적과 비교로 얼룩져 상자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내 어린 시절 말야.

아쉽지만, 그 날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야. 오빠.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됐네. 아득한 한밤중이구나. 가게 점원이 우릴 째려보고 있네. 어쩜 나를 향해서만 저런 눈빛을 보낸담. 물론 오래 가게에 남아있는 건 내가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빠가 이야기하고 있었으면 저런 눈빛을 보내진 않을걸. 마치 속으로 저 말 많은 지지배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잖아. 아무튼 이제 벌써 집에 갈 시간이야. 엄마 기다리시겠다.



근데, 오빠. 자켓 잠깐 내려놓고 잠시만 앉아 있어봐. 아직 할 얘기가 하나 더 남아 있거든. 우리 사이에 대한 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그래. 저 여자 점원과의 기 싸움일 수도 있지. 어쨌든 조금만 더 앉아 있어봐. 오빠. 난 어른이 되지 않기로 했어. 갑자기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고. 내가 지금 말하는 어른은 사회에서 바라보는 어른이야. 30평 집을 사고 매년 한 평씩 ,두 평 씩 늘려가는 삶. 그걸 말하는 거야. 대신, 난 내가 그리는 어른이 될 거야. 어린 시절의 나를 억누르는 대신 그 때의 나를 같이 어루만지면서 나아가는 어른.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그건 참 힘든 길이겠지. 오빠 말대로 가시덤불이 펼쳐진 길일 지도 몰라. 차라리 3년 간 정신차려서 고시에 매달리는 게 더 나을 지도 모르지. 근데, 그렇게 살면 내게 남는 게 뭘까. 오빠. 어릴 때 원치 않는 반장이나 동아리 장 같은 거 맡아본 적 있어?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은 끝까지 나를 괴롭혀. 내 삶을 옥죄지. 그것만 없으면, 삶과 호흡하고 태양이 지는 순간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는데, 그 원치 않은 일 때문에 내 삶을 조각조각 쪼개어 상처 입혀야 해. 그 순간을 꾹 참고 버티라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들었어. 그러다 보면 어른이 된다고. 근데, 그렇게 참고 버티고 했는데, 난 어른이 되지 않았잖아. 차라리 인도에 가서 떠돌이 수도승에게 호되게 기도를 배우는 게 어른이 되기에 더 빠른 길일 것 같아.

지금의 어른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삶을 진리라 생각하고 우리에게 강요해. 그럼 우리는 그들의 삶을 따라가게 돼. 왜 있잖아. 주말엔 모델하우스를 구경하고 외식을 하며, 평일엔 일에 시달리는 삶. 아파트 청약을 위해 메르스를 무릅쓰고 긴 줄을 서는 삶. 평일이면 여성문화회관 앞에서 펜디 선글라스를 쓰고 다른 여자들 앞을 뻐기며 걸어가는 삶. 어린 시절의 나를 철저히 짓밟고 살아가는 삶.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오히려 이용하라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삶. 모두 나 자신에서 나오는 만족감과는 전혀 관계 없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오는 만족감이지.

오빠. 아직 내가 어려서 그렇다고. 그래 그럴 지도 몰라. 언젠가 이 순간을 뼈저리게 후회할 날이 올 지도 모를 거야. 오빠랑 결혼하면 앞에 말한 삶을 살 수 있겠지. 뭐, 거기서 오는 장점도 많아.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점. 내가 우월하다는 착각 속에 빠질 수 있다는 점. 그런데, 그거 뭐가 잘못된 것 같아 보이지 않아? 삶은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건데, 우리는 계속 상대를 딛고 일어서려고만 해왔잖아. 옆에 있는 사람을 꺾으려 하고, 그 사람들에게서 동경의 눈초리를 받으려 하고 말야. 물론 거기서 쉽게 벗어날 수 있을 지는 확신할 순 없다. 그 눈빛들은 마치 마약과도 같은 효과를 발휘해서, 짧은 순간 우리 뇌에 행복감을 안겨주거든. 마치 담배를 끊듯 그 시선에 대한 갈망을 극복해야 할 거야. 그래도. 나 그 길을 가고 싶어.

오빠. 근데 웃긴 게 뭔 줄 알아? 내가 그 길에서 놓고 온 것 중에 지금 가장 아깝고 미련이 남는 게 바로 그 눈빛들이야. 그리고 유일한 미련이기도 해. 이미 난 그 눈빛에 중독되어 있어서 가만히 있다가도 그 눈빛이 그리워지곤 하거든. 그래도 다행이지 않아? 그 길에서 놓고 올 게 그것 하나 뿐이라는 게 말야.





그래. 내가 오늘 오빠를 부른 건, 우리가 갈 길이 다르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야. 우리 이제 이 갈림길에서 갈라져서 걸어가자. 성격차이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문제가 있어서는 더더욱 아니야. 그저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길은 딱 이 언덕까지인 것뿐이야. 아냐, 아냐, 내가 오빠를 사랑하는 사실은 절대 변치 않아. 오빤 내 지난 26년 간 사랑해 마지 않던 삶과도 같은 걸.

언젠가, 우린 먼 훗날 각자의 길 끝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 그 때가 되면 우리 마주쳤을 때 고개 돌리고 그러지 말자. 대신, 그 때가 되면, 다시 서로에게 물어보는 거야.

우리 서로 각자가 원하던 어른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때 그 순간을 후회하는지. 아니면 더없이 만족하고 있는지. 잘가 내사랑. 그리고 안녕. 내 26년 간의 꿈.

















*글에 나온 이야기는 모두 픽션입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4 23:5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