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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단편으로 구상한 8편의 연작 중 셋째 편입니다.
만화로 그리기 전에 스토리를 시험삼아 소설 형식으로 꾸며 보았습니다. 소설이라는 형식은 처음이라 좀 막히기도 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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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언니 오늘도 출근하셨어요?"
"그렇게 됐어. 주말에 쉬는 조건으로."
"그럼 상식이는요?"
"됐어. 애도 아니고 12살짜리가 혼자 집도 못 보나."
"그게 아니라 언니, 다른 날도 아니고 어린이날엔 좀 밖에서 놀게 해 줘야죠. 근처에 애 봐 줄 친척 없어요?"
"친척?"
5월 5일 월요일. 불길한 예감.
사촌누나랑 자형이 엄청난 애물단지를 남겨놓고 가 버렸다.
이 녀석이랑 처음 만난 날은 사촌누나가 우리 동네로 이사 오던 날이었다.
"어, 네가 상식이구나. 그러니까……. 네가 날 뭐라고 불러야 되나……."
"외오촌당숙."
"응?"
"안녕하세요, 당숙."
체구는 그렇게 크지 않은데 이상하게도 줄곧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다시 찬찬히 보니 눈매도 사납고, 아이답지 않게 다부진 체격. 결코 얕볼 수 없는 인상이다. 아이다운 귀염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누나랑 자형이 각자 일이 바빠 아이가 야생에서 커오긴 했지만 그것뿐이라기엔 이 아이가 주는 인상이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한참 만에야 허허 웃으며 어색함을 수습할 수 있었다.
"애가 아주 똑부러지네. 거리감 느껴지니까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
그 이후로 상식이는 종종 우리 집에 놀러오곤 하는데, 애가 날이 갈수록 점점 시크 & 다크로 거듭나고 있어 고민이다.
1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키도 내 가슴높이까지 올라왔고, 들리는 소문으로는 상식이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한다고 왕따를 당한다는 소리도 있고, 한번은 자기 돈을 갈취하려는 불량배 중학생을 때려눕히기까지 했다는 모양이다. 정말일까.
글쎄. 다른 건 몰라도 반에서 겉돈다는 소리만큼은 정말인 것 같다. 만날 때마다 점점 말수가 줄어들더니 이젠 나랑 한 마디 얘기도 안 하고 폰 게임만 하고 있다. 게다가 당당히 충전기까지 꽂아놓고, 하루종일 할 셈이구만.
"무슨 게임 해?"
"……."
"'바벨돌탑 쌓기'? 재밌겠다. 아저씨도 좀 해 보자."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돌아눕는다.
"상식아, 넌 서운하지도 않냐?"
"뭐가."
오, 대답했다.
"어린이날인데 부모님이랑 같이 놀기도 해야지."
"뭐가, 일하러 가신 거잖아. 우리 가정을 위한 거야. 쓸데없이 고집 부리는 건 애들이나 하는 거지."
엉, 요것 봐라.
"놀이공원에나 갈까? 누리랜드?"
"더워."
"수영장은?"
"사람 많은 데 싫어."
"그……. 그럼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나중에 배로 갚으라는 거?"
나는 홧김에 거칠게 폰을 빼앗았다. 그럼에도 상시크는 자세 하나 바꾸지 않고 표정만 찡그리고 마는 것이었다.
"……·아, 아저씨 때문에 무너졌잖아."
"어휴, 뭐 천년만년 탑 쌓기만 할래? 원래 무너지고 다시 세우고 하는 거지."
"어, 뭐야. 갑자기 샌들은 왜 신어."
"일단 나가자. 어디로든. 애가 좀 활달한 맛이 있어야지 이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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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이의 팔을 붙잡고 데려간 곳은 경로당에 붙어 있는 마을 쉼터였다.
"뭐야. 놀이터에 갈 거였으면 아파트 단지 안에도 있잖아."
"얘가 뭘 모르네. 여기가 이 일대 마지막으로 남은 모래 놀이터다. 이런 거 본 적은 있냐? 네 세대가 날뛰어봤자 우레탄뿐이지 뭐."
나는 아무 자리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고 상식이는 그 옆에 조심조심 쭈그려 앉았다.
"자아, 여긴 동해 바다다. 상식아 저기 파라솔, 파라솔."
"바람에서 짠내 나는 것 같지 않냐? 이래야 바닷가지."
"파도는 없어도 흙 파고 물 좀 부어 놓으면 되지."
"맞다. 모래성 만들 줄 아냐? 저기 얘야 잠깐만. 잠깐만 양동이 좀. 뭐? 아, 네 건 나중에 만들면 될 거 아냐. 내놔."
나는 양동이를 조심스럽게 뒤집어 뚝딱 하고 모래성을 만들었다. 어떠냐 상식아. 이런 건 할 줄 아냐?
"아저씨."
"응?"
"아저씨 진짜 작품성이 없다."
"……으응?"
"봐봐, 벽도 만들고 깃발도 꽂고……. 문은 왜 없어?"
순식간에 성채 하나가 만들어지더니 다음엔 아예 성벽까지 축조하고 있다. 양동이를 빼앗긴 아이도, 구경꾼들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날 포함해서.
"아저씨, 가서 물 좀 더 떠 줘."
"아니, 거길 파라는 게 아니고 반대편."
"아직 사람은 만들 줄 모르는데……. 장난감 좀 빌리자."
"양동이가, 이거 말고 다른 모양이 있어야 되는데."
"뭐, 뭐야. 그런 걸 가져오면 어떡해. 푸하하……. 어, 저기 무너진다."
"안돼, 내가 거긴 밟지 말랬지!"
아차,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러버렸다. 구경꾼들 틈에 섞여 있던 아이 엄마가 딸을 어르면서 혀를 찼다.
"에휴. 누가 애고 누가 어른인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숨을 고르고 나니 구경꾼들도 하나 둘 집에 가 버리고 우리 둘만 남았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하늘도 발갛게 물들어 있다.
"파아……. 목 말라 죽겠다."
"나 용돈 있는데. 아이스크림 사 먹자."
"아, 진짜. 이제야 좀 애 같아졌나 했더니. 잠자코 있어, 이런 건 원래 어른이 사는 거야."
"사진 좀 찍고 있을게."
"그래. 성 잘 지켜라."
그러나 돌아와 보니 성은 아이스크림처럼 뭉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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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이거……?"
"아, 이거? 내가 그랬어. 언제까지 여기 세워둘 건 아니잖아. 어차피 무너지고 또 짓고 그러는 건데. 집에 가자."
저 멀리 중학생들로 보이는 무리가 도망치고 있었다.
"상식아, 그……."
"집에 가……자."
"……."
나는 말없이 상식이를 등에 업었다.
누나네 집으로 가는 길은 해도 져서 어두컴컴하고 슬슬 한기가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12살짜리 애 한 명을 들쳐업고 오르막길을 등반하려니 다리도 후들거리고 땀 범벅이고……. 추운 줄도 모르겠다. 후우. 나중에 늙기만 해 봐. 너한테 날 업고 다니라고 할 테니까.
뚜르르르. 뚜르르르.
"어, 동생. 지금 와?"
"응. 언덕고개 올라간다. 상식이도 같이 있어."
"별일 없었지?"
"뭐 별일이라고 한다면 없진 않았지만."
"……그렇게 됐어. 미안, 누나."
"푸하하……. 야, 너도 어릴 때 그랬잖아. 어떤 여자애 모래성 무너뜨려서 나한테 두들겨 맞은 거."
"내가 언제 맞았다고 그래?"
"또 맞고 싶구나 네가. 됐으니까 얼른 오기나 해, 부침개 굽고 있으니까."
뚝.
"상식아."
"……."
"사진은 찍어놨어?"
"……."
"미안. 아저씨가 미안하다. 억지로 끌고 나와서. 혼자만 내버려두고 가서."
"……."
"나중엔 진짜로 동해 바닷가에서 더 큰 성 짓는 거다. 응?"
"……."
그렇지 않아도 땀범벅인 어깨가 점점 뜨끈해져 왔다.
에라, 안 우는 척 할 거면 대답이라도 똑바로 하든가. 하여간 귀염성이 없어요.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0 12: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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