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담배 ]
|
||
| 수영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베란다 창을 활짝 열었기에 바람이 들이쳤다. 손으로 가려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빨았다. 폐 구석구석 담배 연기가 전해지는 느낌을 즐겼다. 오래 전에 따서 미지근해진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역시 못 쓰겠다는 생각에 맥주 캔을 내려놨다. 밤하늘을 보며 맥주와 담배를 즐기는 모습이 사뭇 낭만적이었다. ‘담배가 없다면 남자는 섹스 후에 뭘 하면 되지? 그리고 술이 없다면 일과 인생에 절망했을 때 남자는 뭘 마시면 되지?’ 예전에 읽었던 책의 문장이 떠올랐다. 수영은 가볍게 코웃음 쳤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그 날은 바람도 선선했고, 밤하늘도 유난히 밝았다. 보름달이 평소의 배는 되어 보였다. 자세히 보면 토끼가 열심히 떡방아를 찧고 있을 것 같은 크기였다. 수영은 실눈으로 담배 연기 사이에서 아롱거리는 달을 보았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이제 연애도 결혼도 관심 밖이었다. 가끔 외로울 때면 내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이젠 극복하는 나름의 요령도 생겼다.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서 담배를 맥주 캔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담배 갑을 집었다. 단 하나의 담배만 남아있었다. ‘돗대네.’ 수영은 마지막 담배를 입에 물고 담배 갑을 구겼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문득 아침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선배는 어쩌다 담배 피게 되셨어요?] 종종 담배를 같이 피던 후배의 질문이었다. 요새는 여자들도 담배를 많이 핀다지만, 수영의 연배에서는 대놓고 필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을 알기에 후배가 물었으리라. 하지만 수영은 대답하지 못 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어쩌다 피게 되었더라.’ 수영은 한 모금을 깊게 마셨다. 문득 한 가지 기억이 스쳤다. - 아마 대학 초년생이었던 것 같았다. 입시의 압박감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게 되자, 오히려 뭘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게 되었다. 수영은 그 방황을 한 남자를 만나며 끝냈다. 능글맞은 선배에게 끌려 가입한 동아리에서 만난 그 남자는 수영보다 네 살 연상이었다. 복학생이었고, 어른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이름은 요섭이었다. 수영은 자신감 넘치고 진중한 요섭에게 쉽게 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사귀었다. 수영이 돌이켜도 그 때의 연애는 참 풋풋했다. 교양 수업은 꼭 시간을 맞췄다. 수업 외의 시간에만 만나기엔 부족해 보였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 하고 둘은 항상 장난을 쳤다. 빈 공책에 오목을 두기도 하고, 손장난을 치며 키득거렸다. 귓가에 유치한 밀어도 속삭였다. 주말이 되면 조조 영화를 봤다. 한 시라도 더 일찍 함께이고 싶다는 수영의 요청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면 돌담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인데도 지루한 적이 없었다. 즐거웠다. 수영은 종종 결혼하여 함께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상상했다. 요섭을 닮은 아이를 상상했고, 액자에 담긴 가족사진을 상상했다. 당시의 사랑은 당연히 영원할 줄 알았다. 그래서 요섭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약속을 잡고 들떠 있는 것은 항상 수영이었다. 말을 하는 것은 수영이었고, 듣는 것은 요섭이었다. 항상 함께였지만, 둘 중 하나의 마음은 그 곳에 있지 않았다. 수영은 이를 모른 척 하려 했다. 노력하면 다시 돌아 올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더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수영은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요섭의 연락은 없었다. 요섭은 어느 순간부터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자연히 둘이 만날 기회는 없어졌다. 수영은 동아리 방에 자주 가 앉아 있었다. 혹시나 요섭이 오지 않을까 하여. 하지만 요섭은 동아리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수영은 밤에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수영은 굳은 결심을 하고, 요섭에게 전화를 했다.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었다. 수영의 첫사랑. 행복한 미래의 주인공.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호음만 끊임없이 울렸다. 전화번호가 틀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삼켰다. 이런 이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별마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던 것도 있지만, 이별을 한다 해도 지금과 같은 비참한 이별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 때 휴대폰이 울렸다. 수영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전화가 아니라 문자였다. 하지만 보낸 사람은 ‘요섭’이었다. 수영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자의 내용을 확인했다. [사랑의 반대말이 뭔지 알아?] 헤어지잔 내용도, 미안하단 내용도 아닌 뜻 모를 질문이었다. 수영은 답장을 보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당신만을 사랑한다. 이러지 말아 달라. 힘들다.’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요섭으로부터 다시는 연락이 없었다. 수영은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잊으려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추억이 가득한 선물을 하나씩 꺼내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눈물이 흐르지 않게 고개를 들어야 했다. 담배를 발견한 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언젠가 요섭에게 빼앗은 담배였다. 사월의 어느 날, 함께 명동을 거닐다 요섭이 담배 갑을 꺼냈었다. [담배 피지 마.] [왜?] 요섭은 그렇게 말하며 입에 담배를 물었다. 수영은 그걸 손으로 빼앗았다. 그러자 요섭은 가볍게 찡그리고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이 참.] 수영은 이번에 담배 갑 통째로 빼앗아 가방에 넣었다. [담배 좀 끊으라니까.] [담배 냄새 싫어?] [그게 아냐.] 수영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랑 오래오래 살려면 몸에 해로운 담배는 안 된다구.] 요섭이 피식 웃자, 수영도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꼈었다. 행복한 추억이었다. 수영은 당시의 기억에 더 견딜 수가 없어 목 놓아 울었다. 비로소 둘의 사이가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그 동안 악몽을 꾸고 난 뒤의 어지러운 기분이었다면, 이제는 모든 것이 명쾌해져 더욱 끔찍한 기분이 되었다. 요섭은 그녀를 떠났다. - 어느 정도 삶의 안정을 찾고도 수영은 담배를 버리지 못 했다. 아니, 버릴 수가 없었다. 주고받은 선물과 달리 담배에는 요섭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그의 품에 안길 때마다 강하게 났던 담배 냄새. 때문에 버릴 수가 없었다. 잊어야 했다. 상대는 나 따위는 잊은 채, 나의 상처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수영은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수영은 담배를 손에 쥐었다. 버리지는 않았다. 대신 아버지의 라이터를 찾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담배 한 개비를 집었다. 불을 붙이려 했지만 잘 붙지 않았다.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하얀 가지에 작은 불꽃이 피었다. 바람이 불자, 요섭의 기억이 연기가 되어 수영을 감쌌다. 수영은 그리운 그 냄새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담배 연기 때문인지 그리움 때문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담배가 다 타자마자 새로이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수영은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한 개비. 하지만 코가 마비되어 더 이상 담배 냄새를 느낄 수 없었다. 수영은 서투르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마신다는 이질감. 그리고 폐를 찌르는 날카로운 감각에 기침을 했다. 하지만 강렬한 냄새는 분명하게 느껴졌다. 요섭의 기억도 날카롭게 폐부에 꽂혔다. - ‘그랬었지 참.’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 생각한 그 순간도 어느 새 잊은 수영이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 이별의 순간에는 부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경험으로 깨달았다. 첫 사랑의 아픈 기억도 잊히고 남아있는 건 흡연의 습관뿐이었다. 수영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하지만 이미 담뱃불은 꺼지고 회색 재만 위태위태하게 매달려 있었다. 너무 오래 과거에 빠져있었다. 수영은 검지를 튕겨 재를 떨어냈다. 그리고 담배 갑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요섭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윤곽조차 희미했다. 분명한 것은 그가 피던 담배 냄새뿐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 [사랑의 반대말이 뭔지 알아?] 수영은 창문 밖에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대답하듯. 조용히 말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에요.]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수영은 창문을 닫았다. |
||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0 06:38: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