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자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으뜸 축에 끼는 것이 고시생 책을 훔쳐가는 자이다. 고시 공부를 해 본 사람이라면 자신의 책이 분실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안타깝게도 고시 서적들은 대부분 고가이고 중고품도 헌책방을 통해 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에 도난 사고가 빈번히 발생한다.

도난 사고가 가장 많은 곳은 법대 건물이다. 그래서 법대 건물 곳곳에서는 종종 "도둑들에게 쓴 편지"를 접하게 된다. 이 편지들은 주로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강의실 입구나 엘리베이터 내부, 혹은 화장실에 부착되어 있다. 물론 그 편지의 주된 내용은 훔쳐간 물건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수 년에 걸쳐 공감어린 시선으로 그 편지들을 지켜본 나는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도둑들을 향한 편지의 유형이 두 부류로 극명하게 나뉜다는 점이다. 유형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글쓴이가 증거를 확보하고 있는지 여부이다.

만약 글쓴이가 CCTV나 목격자 등의 증거를 확보하고 있어서 도둑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라면 일단 편지에 사용되는 말투가 상당히 거만해지는데, 글쓴이들은 "넌 이미 내 손 안에 있다"라는 뉘앙스를 굳이 감추지 않는다. 이러한 유형들의 편지는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 부분은 도둑들에 대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비난이다. 여기엔 "얼굴을 보니까 낯선 분도 아니던데 왜 그러셨습니까" 등등, 언뜻 보아서는 협박인지 비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문구도 간혹 사용된다. 그리고 본론 부분에서는 "절도"와 "점유이탈물횡령"의 차이점을 지적하면서 단순 절도도 얼마든지 형사처벌이 가능함을 시사한다. 여기서는 협박성 짙은 문구가 거침없이 사용되곤 하는데, "형사처벌 받을 경우 국가고시 응시 자격에 제한이 가해질 수도 있습니다" 등등의 멘트가 전형적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론 부분에서 글쓴이는 자신의 넓은 아량을 과시하면서, 도둑에게 갱생의 기회를 주겠노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모월 모일 몇 시에 훔쳐간 책들을 어딘가에 맡기라고 덧붙이는 것이다.

두번째 유형은 글쓴이가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이다. 요새 새로 지어진 건물에는 대부분 CCTV가 설치되어 있지만 오래된 건물은 그렇지 못하다. 게다가 요새 도둑들은 워낙 영악하기 때문에 어느 열람실에 CCTV있다는 것 정도는 모두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증거를 확보하는 경우보다는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 경우 편지는 첫 번째 유형과 반대로 날카로움이나 논리성이 결여되며, 상당 부분 감정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 첫번째 유형의 경우에는 간혹 반말로 쓰여지는 경우도 있지만, 두 번째 유형은 100% 존댓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심정으로 쓴 글이기 때문에 서론, 본론, 결론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 다만 많이 사용되는 문구들을 꼽아 보자면, "제가 책값을 드릴 테니 제발 제 책만 돌려주실 수 없을까요?" 등등의 주객이 전도된 표현, "훔쳐가신 것이 아니라 잠시 보관하고 계신 거라면 010-xxx-xxxx"로 연락주시기 바래요" 등등의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는 표현, "저 이번 시험 떨어지면 군대 끌려갑니다" 등등 자신의 인생을 언급하는 표현이 있다. 보통 두 번째 유형의 편지는 새내기들이나 저학번 후배들에 의해 작성된다. 대학의 살벌한 면을 질리도록 접해 경험치가 쌓인 고학번들은 그러한 편지 따위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지들이 유형별 분류가 가능해질 만큼 대학가에 범람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앞으로는 학교에서 도둑들에게 쓴 편지를 접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4년제 대학에 다닌다는 사람들이 남들의 노력의 결정체를 무자비하게 빼앗아 가는 일을 자행하고도 반성할 줄 모른다면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사람들이 고위공무원이나 법관이 되어서 입으로 정의를 외치고 다닐 생각을 하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하여간 고시생의 책을 훔쳐가는 자들은 삼족을 멸해야 마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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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6 05:1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