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크레파스의 전설

    내가 가장 처음 만난 색깔 도구는 크레파스였다. 일본 사람들은 본래 근본 없는 괴상한 단어를 지어내는 데 귀재들이므로 "크레파스" 역시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말일 것이다. 미국 초딩들은 크레파스라는 단어를 알지 못한다. 걔들은 담배갑처럼 생긴 상자에 들어있는 12개의 주사기처럼 생긴 크레용으로만 그림을 그린다. 크레용은 양초 문지르는 것처럼 답답해서 싫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크레파스를 좋아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 크레파스라는 놈이 처음부터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크레용보다 시원하게 미끄러지긴 했지만, 내 손가락에 비해 너무 굵었고 냄새가 났으며 쉽게 닳아 없어졌다. 그리고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되면, 선생님들은 애들한테 하등의 교육적 근거가 없는 주문을 내리곤 했다. "밑그림은 노랑으로 그리세요", "배경은 빨강으로 칠하면 안 돼요" 등등. 가장 어이 없는 건 "좀 더 꼼꼼히 칠하세요" 하는 주문이었다. 왜 미술 시간에 크레파스를 덕지덕지 문지르는 막노동 해야 하는지 나는 이해가 안 됐다.

    지금 크레파스를 손에 쥐면 아주 작아 보이지만, 어렸을 때에는 그걸 손가락으로 감아서 잡기가 힘들 정도로 굵게 느껴졌다. 그걸 쥐고서 아직 밑그림만 그려진 도화지를 쳐다보면, 마치 여백이 우주처럼 느껴지곤 했다. 이 넓고 황량한 흰색 바다 위에 무슨 수로 이 몽당 크레파스를 넓게 펴 바르나. 애들 그림은 하늘이 절반인데, 멍청한 크레파스 회사는 왜 하늘색 크레파스를 하나씩 더 넣어주는 센스가 없는 건가. 이런 저런 불평을 하면서도 우리는 선(線)으로 면(面)을 이루어 내는 기적을 행하기 위해 미술 시간마다 오른팔의 삼두박근을 혹사시켰다.

    그러던 와중에 나는 크레파스 계(界)에 내가 아직 모르고 있었던 신비의 색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색깔의 이름은 내 짧은 인생을 걸쳐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이름이 들어간 크레파스 세트를 찾아보려고 온 문구점을 뒤졌지만 나는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로마 시대에 황제를 상징하는 보라색을 맘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처럼, 그 색깔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아마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색은 정말이지 신출귀몰했다. 분명 1분단 애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 색을 사용할 것인지 여부를 토론하고 있는데, 내가 직접 가서 그 애들이 가진 크레파스들을 살펴보면 걔들은 빨강, 노랑, 파랑, 초록 정도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황에 미루어 그 색깔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색의 별칭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그 색을 사용하기 위해서 선생님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미술 시간 중반쯤 되면 꼭 "선생님, XX색 칠해도 되나요?" 하고 물어보는 애들이 있었다. 그 때마다 손을 번쩍 들고 "XX색이 대체 무슨 색이에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1학년 때 돈가스 먹어본 걸 손 번쩍 들고 자랑했다가 선생님과 반 아이들의 비웃음을 받은 트라우마가 있어서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돈가스와 크레파스는 별로 상관이 없지만 원래 트라우마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반면에 그림에 따라서는 그 색이 반드시 들어가야만 하는 것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친구들이 선생님께 "선생님, XX색 꼭 칠해야 되나요?" 하고 묻는 것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완성된 친구들의 그림을 아무리 관찰해 보아도 내가 이름을 모르는 색은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칠해놓고 시간이 지나면 변색이 되는 걸까 싶어서 바탕색을 사용하겠노라고 당당하게 선언한 녀석 옆에서 한참 알짱대 보았는데 그 녀석은 나를 의식한 것인지 도통 그 금단의 크레파스를 꺼내들지 않았다. 마치 황금색 크레파스를 꼭꼭 숨겨 두고 아껴서 사용하던 2학년 때 내 짝꿍 처럼...

    그 색의 이름은 바로 <바탕색>이었다. 바탕색의 의미를 알게 된 이후 나는 선생님께 "바탕색 칠해도 되나요?" 하고 묻는 애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칠하고 싶으면 그냥 칠하면 되지 그걸 왜 묻는 건가. 다만 나는 아주 짜증이 날 때에는 가끔 "바탕색 꼭 칠해야 되나요?" 하고 묻기는 했다.

    그러던 어느날, 삼촌이 우리집에 놀러오셨다. 그 날도 나는, 바탕색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근력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체념을 하면서, 힘겹게 미술 숙제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삼촌은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굉장한 속도로 크레파스를 왕복운동시키고 있는 나를 매우 신기한 듯이 바라보셨다.

    "배경이 너무 넓으니까 그냥 안 칠해도 될 것 같은데?"

    삼촌이 측은한 어투로 말씀하셨다.

    "그러면 선생님한테 혼나요"

    "크레파스만 써야 되니?"

    "아니요, 그냥 자유인데요."

    그러자 삼촌은 내 방으로 들어가 낯익은 도구를 꺼내오셨다. 그것들은 내가 크레파스 다음으로 싫어하는 미술도구들이었다. 물감, 붓, 팔레트, 물통의 사종 세트인데 내가 문방사적(文房四敵)으로 여기는 것들이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는 걸 보고 삼촌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리 줘 봐. 삼촌이 신기한 거 보여줄게."

    "안 돼요, 그러다가 다 번지면 어떡해요?"

    나는 크레파스와 물감이 섞여서 그림이 엉망이 될 것 같아서 무서웠다. 하지만 삼촌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하늘색 물감을 풀어 비어있는 배경에 슥슥 칠하셨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신기하게도 크레파스 위로는 물감이 묻지를 않았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크레파스는 유성(油性)이기 때문에 물감과 섞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른한 붓질 몇 번만으로 넓디 넓은 배경이 모두 메꿔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나는 신천지에 온 느낌이었다. 마치 매트릭스의 배양기 속에서 깨어난 네오처럼, 보리수 아래에서 열반에 이른 석가모니처럼.

    예전 같았으면 벌써 결혼을 해서 애를 낳을 나이가 되었지만 이제껏 살면서 그 때만큼 강렬한 깨달음과 충격을 동시에 받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도를 깨우친다는 것은 아마도 그런 기분이리라. 아직도 근 20년 전 그 순간의 환희를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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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19 20: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