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정 ]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지연의 질문에 동원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우선은 도와주기로 했는데…….]

그리고는 잔에 남았던 술을 마저 들이켰다.

두 사람은 대학가의 싸구려 술집에서 안주 하나를 놓고 마시는 중이었다. 빈 소주병이 둘, 그리고 새로 열고 있는 소주병이 하나. 남녀의 모습은 아주 편해 보였고, 잔을 주고받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그런 애들 나도 잘 알아.]

지연의 잔을 따르고 자신의 잔마저 채운 뒤, 동원은 입을 열었다.

[상대를 살짝 떠 보고 자신의 품 안에서 이리 재고 저리 재보는 거지. 그걸 뭐라고 하더라…….]

지연은 답을 알고 있었지만 기다렸다.

[어장 관리? 그래, 어장 관리.]

지연은 미소로 맞장구쳤다.

※

이야기는 대학 동기인 ‘사조’가 중심이었다.

사조는 과에서 여신으로 대접 받고 있었다. 단순히 예쁜 외모 때문은 아니었다. 상대방을 쥐고 흔드는 말투와 행동이 남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친절한 듯 행동하다가 한 편으로는 무뚝뚝하게 대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상대의 관심이 자신에게 넘어왔다 싶으면 오해할 말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특히 가벼운 부탁으로 상대와의 접점을 만들고 조종하는데 능했다. 그 외모와 밀당으로.

여자 동기들 사이에서는 이미 눈 밖에 난 사조였지만, 남자는 동기뿐만 아니라 선후배들도 모두 사조의 손에서 놀아나는 형국이었다. 더 괜찮다 싶은 남자가 생기면 새 건전지로 바꾸듯이 남자를 갈아치웠다. 자신이 제출한 레포트는 많지만, 직접 작성한 레포트는 한 과목도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런 모양이었다.

그런 사조가 드디어 동원 선배에게 손을 뻗은 것이다. 사조가 여우처럼 굴어도 관심 주지 않는 남자도 있기 마련이었다. 동원 선배도 그런 남자였다. 어장을 아무리 넓게 만들어도 자신은 관심 없다는 듯이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

사조는 오히려 그런 물고기를 탐냈다. 물론 사조가 어떻게 구는지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어장 관리가 하나의 능력이 되어버린 요즘에는 특히. 하지만 상대가 동원 선배라는 점이 문제였다. 일 년 넘게 짝사랑 해 온 동원 선배.

[아무튼 외모 하나만 믿고 그런지는 몰라도 자신감 하나는 넘치더라. 부탁하는데 아주 당당하더라니까? 하하.]

동원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에 지연은 살짝 긴장했다.

[그래도 남자들은 그런 타입 좋아하잖아요?]

목소리에 혹시 자신의 감정이 묻어나진 않았을까 조심하며 물었다.

[곰 같은 여자보다는 여우같은 여자가 좋다던데.]

동원은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대답했다.

[난 사람들 사이에 순정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

지연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동원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참 푸근했다.

[요새 보면, 그렇잖아. 이리 저리 재고 조건을 따지고……. 사람들 사이의 사랑도 좋아한다는 감정 하나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잖아. 밀고 당기고 서로의 진심을 묻고 따지고.]

동원은 잔을 손에서 만지작거렸다. 지연은 그런 동원을 두근거리며 바라봤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얼굴과 그 말투가 좋았기에.

[하지만 나는 서로 진심을 터놓고 오랜 시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 아니, 아무 말 없이 함께 있으면 편한 사람과 연인이 되고 싶어. 내가 너무 이상만 꿈꾸는 걸까?]

꿈꾸는 표정에서 황급히 깨어난 지연이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자신의 마음이 알려져 어색해질까 불안해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면서.

그 뒤의 술자리는 여느 때처럼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빈 병이 탁자에 쌓여가고, 서로의 얼굴에 취기가 돌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스 정류장까지 지연을 바래다주고, 동원은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갔다. 작년부터 이어져 온 익숙한 모습이었다.

누군가 보면 연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지연은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두근거렸다. 이미 남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 했다는 점만 달랐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동원은 진심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굉장한 순정파였다. 지연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진심, 동원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컸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진실 된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해질 것을,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을 믿었다. 만남이 계속 될수록 그 믿음은 커졌다.

아마, 다음에 만날 때는 더 확실하게 전해지겠지. 진솔한 이야기가 오가고, 서로에게 빠졌을 때 쯤, 선배 혹은 자신이 진심을 털어놓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김없이 행복했다. 지연은 달콤한 망상을 하며 잠들었다.

※

하지만 선배가 매번 부르던 금요일에는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토요일도, 그 다음 금요일도. 지연은 언젠가 둘 만의 술자리가 돌아올 거라 믿었기 때문에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약간의 불안함은 있었지만. 다행히 동원의 연락은 오래지 않아 왔다.

하지만 단둘의 술자리는 아니었다.

술자리에 나타난 것은 동원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는 한껏 화사하게 꾸민 사조가 함께 있었다. 동원은 진지하고 푸근한 분위기 대신 한껏 들뜬 기분을 드러내며 술자리에 나타났다.

[내가 말했지? 지연이라고 내 정말 소중한 후배야.]

[반갑습니다. 사조라고 해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방긋 웃으며 말하는 표정에는 승리감과 도취감이 가득했다. 지연은 충격적인 전개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인사를 받았다. 사조와 동원 사이의 이야기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가벼운 부탁.

별 뜻 없는 수락.

가벼운 보답.

그리고 이어진 만남.

서로에 대한 묘한 감정.

그리고…….

동원이 느끼는 그 감정이 사랑이란 점은 지연도 알 수 있었다. 짝사랑의 아픔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 앞에서 어느 정도 위로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지연은 그러지 못 했다. 옆에서 웃고 있는 사조의 표정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워 보였기 때문일까.

그 표정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가 아니라, 끝내 자신의 어장으로 들어오게 된 거대한 활어를 본 만족감 때문이었다. 지연은 거기에 덕지덕지 붙은 감정도 볼 수 있었다. 변변치 못한 어부의 박탈감을 본 승자의 여유였다.

그 날 두 사람을 일찍 보내고 지연은 집으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혼자 가는 길이 너무나도 춥고 길게 느껴졌다. 그날 비가 온다는 예보는 없었지만, 지연의 목에는 차가운 물방울이 거세게 흘러내렸다.

[진심은…… 무슨…….]

찬바람이 목덜미를 스쳤고, 지연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