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너를 다시 만나며.

너를 처음 만나 지나간 시간이 벌써 십여년. 우정이나 사랑이나 뭘 하던 충분한 시간인데 우리는 아니라고 봐야겠지. 고등학교 시절을 같이

보낸 기간이 2년 그리고 그 후로 만나지 못한게 십년쯤.

난 우리가 다시 이렇게 볼 일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물론 오늘 같은 일로 만나게 될 거라고 예상도 못했으니까. 쓰으읍, 후.

널 피하려는 건 아니지만 어딘가에 잘 살고 있으면 그만이지 꼭 봐야 할 이유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더라. 내가 너를 찾지 않아도 너는 여전히

나를 기억할 것 같아서. 남자의 직감 운운 하는 것은 웃기지만 너는 나를 원망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 하나도 변한 게 없

을거야. 내가 너를 밀어내고 거리를 둘 수록 더 부딪혀 보려는 그 성격.

처음에 네가 좋아한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어. 태연한 척 하려고는 했지만...네가 너무 당돌해서. 그 때 만큼은 가끔 생각이 나. 새카만 밤에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는 특히. 그 전에도 지금까지도 나에게 너 만큼 솔직하고 당당하게 마음을 드러내며 다가온 사람은 없었어. 그건 내가

잘못 살아온 탓 일 수도 있고 어쩌면 사람들과 밀고 당기고 하는 사이에 정작 뭐가 중요한지 잊어버려서 일 수도 있지.

어쨌거나 너는 정말 대단한 여자야. 너는 내가 네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눈을 빛내면서 얘기했지. 네 속삭임은 우리가 있는 곳

이 삭막한 수험실이라는 사실을 잊게 했고 깜깜한 창 밖에 반짝이는 별이 나에게로 쏟아지는 듯한 황홀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지. 머리속은 막

산 꼭대기에 오른 듯이 상쾌해졌고 생전 처음 누군가로부터 완전하고 당당하고 숨김없는 마음을 받아보는 느낌과 경험은 아주 특별했어.

내가 말했듯이 나는 네 마음을 충분히 알았고 나도 그런 네가 싫지는 않았어. 그건 너도 잘 알거야. 하지만 그 날 밤 교실에서 내가 받았던

특별한 느낌은 거기까지였어. 그런 감정이 잠깐 들었다고 너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또 너와 사귀어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솔직하게 말하면 그 전에 너에게 가지고 있던 우정이나 이성적 감정은 우리가 가까워 질 수록 점점 더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네가 나에게 좋아

한다고 말하던 그때 정점을 찍고 빠르게, 아주 빠르게 사라지더라. 이유는 몰라. 그냥 그랬어. 그리고 그렇게 된 이상 아무리 이상하게 보인다

고 해도 어찌 할 수 없는 노릇이잖아.

이제 정확하게 기억도 나지 않네. 일요일이었나... 공부고 뭐고 다 싫어서 반항하는 마음으로 자율학습을 토끼고 집에 와서 마땅히 볼것도

없는 티비를 돌리다가 네 전화를 받았었지. 집에 부모님도 계셨고 동생도 있었고 또 너한테 알 수 없는 반감이 들어서 대충 전화를 끊었었는데

전화를 끊고 후회했어. 너한테 짜증이 났는지 채 참지 못하고 집으로 도망온 나한테 짜증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화풀이를 한 것 같았어.

나에 대한 너의 마음도 거기서 멈추고 나도 너한테 더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결국 내가 너를 찾게 되는 건 내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였네, 차라리 네가 나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 널 보면서 이렇게 불

편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거야. 죄책감도 아니고 애틋함도 아니고 목에 걸린 가시마냥 거북스럽고 불편하면서도 굳이 확인하게 되는 이런 감정

을 뭐라고 해야 할지. 그래서 너에게 다시 용기내어 말을 걸 수는 없었지만 궁금했어. 왜 내가 너를 거절했는데도 너는 여전히 나를 잊지 못했

는지. 또 모두 잊었다는 것 처럼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보냈던 선물들과 한 자 한 자 꾹꾹 써내려 부대로 보내 온 편지들은 무슨 의미인지...

너는 모든걸 하면서도 너라고 말하지 않았어. 마치 내 모습을 보기만 해도 기쁘다는 걸 나에게 어필하려는 것처럼 가만히 숨어서 내가 너를

알아차려주기만을 기다렸지. 네가 다시 한번만이라도  소리내어 나에게 네 마음을 전했더라면 우리는 지금과는 또 전혀 다른 사이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거야. 하지만 나는 네가 절대로 먼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어. 예상대로 넌 그 고백 이후 다시는 비슷한 말조차 꺼낸적 없

고. 어쨌든 그 시절을 보내는 남자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나 역시 뭐라도 아쉽고 그리울 때라 미안함이나 호기심, 의아한 마음같은건 그저 사치

였고 나는 네가 뭘 하던 간에 마다 할 이유가 없었어. 여자친구가 막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던 때이기도 하고. 네가 나에게 끊임없이 너를 기억

시키는 방법이 그런 것들 이었다면 나 또한 최선을 다해 네가 나를 기억하게 하는 방법이었지. 웃기지만 나는 그정도만 하면 내 할일을 마땅히

했다고 생각한거야. 마치 처음부터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을 다 알고 있었던 것 처럼.

복학 한 후에 한번정도 네가 나를 찾아오는 상상을 해 봤어. 너는 그러지 않았지. 여전히 너는 우리 사이에 아무 것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그리고 조용히 살고 있었지. 남자도 사귀고 공부도 하고 우리 나이또래 친구들이 하듯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그저 그런 얘

기만 간간히 동창들한테서 전해들었어. 나는 나대로 복학 후 학점관리에 취업 고민에 바빠 져서 또 네 기억은 묻어버렸지. 지금와서 하는 말이

지만 네가 나에게 잘 해준거. 군바리 심심하지 말라고 신경써준거 다 고맙게는 생각했어. 내가 그러지도 않았다면 정말 나쁜놈이지. 분명히 그

때는 꼭 한번 고맙다고 전화라도 하던가 밥이라고 먹자고 해아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건 다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고 불

편한 자리가 무서웠기 때문이었지 다른건 다 핑계였어. 왜 그랬을까. 네 마음을 받아주지는 못하면서 계속 확인하고 싶은 거. 뒷감당 하기 어

려워서 머뭇거리면서 계속 시간만 죽이고 있었던거.  나도 여자친구가 있고 너도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서 계속 서로의 안부를 전해 듣고 내 이

야기를 네가 물었다는 것을 또 내가 전해듣고....  내 옆에 네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디서 네가 내 얘기를 전해들을 것을 생각하면 내가 아무

렇게나 허투르게 살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너와 나는 어떤 말도 주고받지 않았지. 신기할 정도로. 그리고 바보처럼. 시간이 지나는 것만 보

고 있었어.  둘 중 하나라도 먼저 연락하거나 서로에게 나타나면 패자가 되는 것 처럼. 한번쯤은 너를 만나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도 물어

보고 장난으로나마 네 마음을 떠보고 싶은것 역시 내 진심이었는데.

"발인은 언제한대."

"내일 아침에."

"......"

"너도 담배 그만 피고 들어가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 금방 들어 갈게."

쓰으읍. 후. 태우고 버리고 태우고 버리고. 이렇게 생각해본들 네가 대답을 해 줄 것도 아니고 우리 이야기도 둘만 기억하는 추억일 뿐이겠지.

아니, 이제는 나 혼자 안고가야 하는 기억이 되겠구나. 아쉬움도 후회도 없다. 그런거 느낄 나이도 아니고 너에대한 기억도 담배 몇 가치 피어

물 시간에 다 태워버릴 만큼 이제는 희미해져서 잘 떠오르지 않거든.

너에게 사랑을 바란 것은 아니고 너 또한 나에게 바란게 사랑이 아닌것을 알아. 그래서 어떤 말로 너를 보내야  할지 오는 내내 고민했다.

젊은날에 교실 한 켠에서 네가 선물해 준 그 소중한 경험, 덕분에 나는 지금도 여전히 밤하늘을 볼 때 마다 마치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

지곤 해. 우리가 사랑이 아니었지만 내가 사랑을 떠올릴 때 나는 늘 그 교실 한 켠에 서서 쏟아지는 별빛을 받고 있더라.

쓰으읍. 후.

그냥...다 고마웠다. 나중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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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깃거리로 생각하던 건데 ..독백체로 푸는게 나을거 같아서.
글 읽어주신 분들께 큰절..!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4 23:0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