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기억]

      성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집안은 고요했고, 아내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곱게 잠든 모습. 성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단정하고 아담한 공간. 둘의 집은 특별한 것이 없는 흔한 신혼집이었다. 그리고 성수는 그런 평범함에 만족했다. 나와 그녀의 공간. 그리고 서로의 색깔이 하나로 포개진 공간에서 함께 생활한다는 것에 행복을 느꼈다.

      성수는 아내 곁에 누웠다. 업무에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이상할 만큼 가벼웠다. 아내 유진은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성수는 아내의 볼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리고 자신도 그녀의 곁에 누웠다. 침대는 두 사람이 누우면 꼭 맞는 크기였다. 성수는 더 큰 침대를 사길 원했다. 하지만 유진은 이 침대를 골랐다. 돈 문제냐며 물었을 때, 유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작아야지 더우나 추우나 꼭 붙어서 잘 핑계가 생기잖아요.>

      그 미소는 정말 아름다웠다. 잠든 유진의 입가에 미소가 얼핏 보였다.

      성수는 아내를 위해 침대 곁의 스탠드만 켰다. 노란 빛이 방안을 희미하게 비췄다.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았다. 이런 날이 있기 마련이다. 술 한 모금 넘어가지 않았는데 과거의 기억에 푹 빠져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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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 전 겨울이었다.

      성수는 복학하고 아는 사람이 부쩍 줄어들었다. 친했던 남자들은 군대에 있거나 졸업을 했고, 여자들은 모두 결혼을 했거나 회사 일로 바빴다. 대학생활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 했을 때, 어떻게든 타개책을 찾고자 과 활동을 했다. 하지만 복학생의 입장은 생각보다 불편했다. 술자리를 가져도 동년배 친구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누기 일쑤였다. 신입생과 복학생 사이는 물과 기름 층처럼 쉽사리 섞이지 못 했다. 서로가 불편한 것을 알기에 적당히 타협하고 묵인할 뿐이었다.

      <선배, 저도 한 잔 주세요.>

      뜻밖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니 유진이 잔을 들고 옆자리에 와 있었다. 훗날 유진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너무 놀란 표정을 지어 도리어 민망했다고 한다. 그래도 싹싹하게 말을 걸며 술을 받아갔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오가는 분위기까지가 힘들었지만, 고비를 넘기고부터는 순조로웠다. 그 날 술자리는 선후배의 벽이 없었다. 그리고 성수는 유진의 당당함에 반했다.

      과방에서 그녀를 만나길 기대하며 기다린 날이 많았다. 물론 대다수는 허탕이었다. 다음 학기가 돼서야 다시 유진을 만났다. 성수가 용기를 내 약속을 잡고, 식사를 같이 했고, 번호를 교환했다. 가벼운 안부와 잦은 만남. 그리고 어설펐지만 진실했던 고백. 둘은 그렇게 연인이 되었다.

      <사실 과 활동은 자신 없었어요. 성격이 그렇게 밝은 편이 아니라. 선배한테 용기내서 말 걸 때까지 한참을 망설였다구요.>

      사실 둘 다 학교에 비빌 언덕이 없었던 터였다. 유진은 집안 사정으로 잦은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친구를 사귈 시간도 없었다. 학업을 병핼 할 수 없어 휴학을 하고 학비를 마련했다. 하지만 복학을 해도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는 쉴 수 없었다. 꿈같은 학창시절은 남의 이야기였다. 작은 인연이라도 필요했던 유진은 과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성수에게 말을 건 것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타이밍이 좋았다.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하나 봐요. 아니면 운명?>

      성수는 운명이라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시의 행복을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성수도 형편이 좋진 못 했다. 성수는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고, 유진은 주말 아르바이트였다. 자연히 학교에서 만나는 시간이 많았다. 남들 같이 먼 곳으로 떠나는 데이트는 없었다. 하지만 그럴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유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완벽하게 보였으니까. 도서관에서 머리를 맞대고 공부할 때도, 잔디밭에 앉아 서로 기대 노을을 바라볼 때도, 손을 잡고 교정을 나설 때도 완벽했다. 행복이란 녀석이 이렇게 헤픈 녀석인가 싶은 생각을 했다. 성수에게 행복은 유진과 함께 있으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약간의 불안함도 있었다. 유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까? 결혼을 하고나서야 조심스레 물을 수 있었다. 유진은 잠시 아늑한 시선을 보내더니 대답했다.

      <저는 이 사람이 내 곁에 있어 행복하단 생각만 떠올랐어요. 행복해-라는 말이 꽉 들어차서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 했는걸요.>

      그리고 예의 그 미소를 덧붙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성수는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씩 웃어버렸다.



      유진은 휴학을 자주 했다. 내색은 안 했지만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밝은 모습만 보여주던 유진이었다. 성수는 흥미 없던 공부에 다시 몰두했다. 둘의 행복을 지키고 싶었다. 유진은 자신의 짐을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건 남자친구인 성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학점은 아슬아슬했지만, 준비를 착실히 한 덕분에 나쁘지 않은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성수가 직장에 다니면서 유진을 볼 기회는 더욱 줄었다. 대신 주말마다 유진을 집까지 바래다주러 갔다. 유진이 아르바이트 하는 곳은 작은 카페였다. 꽤 번화한 거리에 있어서 알바 비는 좋았지만 그 만큼 늦게까지 일해야 했다. 막차를 놓치기 일쑤였다. 성수는 그런 유진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일하느라 피곤한데 나 때문에 미안해요.>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행복한 얼굴이었다. 성수도 그랬다. 손에 익지 않은 회사 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주말에 유진을 만날 생각에, 그리고 앞으로 일을 생각하며 버틸 수 있었다. 토요일, 일요일 밤에 함께 걷는 것이 다였지만, 둘에게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결코 짧지 않은 거리도 아쉽게 느껴졌다.

      평일에 유진이 회사를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었기에 잠깐 얼굴을 보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성수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반복되는 행복이 일상이 되어갈 때 쯤 문제가 생겼다. 유진이 휴학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미 휴학을 너무 많이 쓴 것이다. 하지만 학비는 여전히 부족했다. 공부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내색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앞서 걸었다. 성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지금 뿐이란 생각을 했다. 성수는 유진의 뒷모습에 대고 외쳤다.

      <나와 결혼 해줘>

      유진의 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직접 보진 못 했지만 놀란 표정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모아 둔 돈이면 네 학비와 생활비를 댈 순 있어.>

      취직을 결심할 때부터 담아온 말이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의 진심이 잘못 전달 될까봐 두려웠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만 널 보는 걸로는 부족해…….>

      성수는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젠 매일 너와 함께 하고 싶어.>

      성수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반지가 있었다. 첫 월급으로 산 반지였다. 유진은 반지가 아닌 상자를 보고 내 진심을 알았다고 했다. 항상 주머니에 넣어둔 탓에 상자는 닳고 닳았었다. 내 결심이 오래 전부터 흔들리지 않았음을 낡은 상자를 보고 알았다고 한다.

      <다시 한 번 물을게. 나랑 결혼 해줄래?>

      유진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성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떨리는 목소리로 유진이 대답했다.

      <고마워요. 날 사랑해줘서.>

      나야말로 고마워. 당신이 날 사랑해줘서. 그렇게 말 하는 대신 성수는 유진을 꼭 끌어안았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추운 겨울이었다.





      결혼식은 없었다. 대신 혼인신고서와 짧은 신혼여행이 있었다. 유진이 제안한 신혼여행은 서로가 자라온 곳을 가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당신을 알고 싶어요. 그리고 조금 더 날 알아주세요.>

      유진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평생 함께할 사람과의 시작은 이렇게 하고 싶었어요.>

      어릴 때 뛰놀던 놀이터. 학교 앞 구멍가게.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비밀 장소.
서로의 과거를 알아가며 우리는 두 번째 시작을 했다.

      <우린 이제 과거와 미래가 하나로 연결된 거예요. 그러니까 어디 도망갈 생각 말아요. 후회해도 늦었어요.>

      유진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을 때, 성수는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툭-.

      성수가 옆을 보니 탁상액자가 떨어진 소리였다. 손을 뻗어 액자를 집었다. 둘이 찍은 결혼식 사진이었다. 진짜 결혼식은 아니었다. 부케와 면사포만 겨우 구해 찍은 가짜 결혼식 사진. 하지만 둘의 사랑과 행복은 진짜였다.

      성수는 잠든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결혼 허가를 구하기 위해 유진의 집에 방문 했었다. 가족들을 소개 받는 자리에서 유진의 남동생을 보고 무심코 측은하단 생각했다.

      ‘어느 누구보다 완벽한 여자가 곁에 있지만, 그 여자의 남자는 될 수 없구나.’

      그랬다. 그 때의 생각도 그랬고, 지금의 생각도 그렇다. 유진이야말로 성수의 평생 반려였고, 영원한 영혼의 반쪽이었다.

      성수는 잠든 유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성수는 서랍에서 작은 약봉지를 꺼냈다. 그리고 파란색 알약 두 개를 삼켰다. 잠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잠든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차가운 손을 꼭 잡았다. 나른함이 몰려오자 성수는 두 알을 더 물 없이 삼켰다. 엷은 미소로 잠든 그녀.

      고통이 심해 잠 못 이룰 때를 위해 의사가 처방한 수면제. 하지만 그녀는 거부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온전한 정신으로 당신과 함께 할래요.>

      그리고 마지막까지 약을 거부했다. 덕분에 수면제는 충분했다.

      잠이 쏟아져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성수는 남은 약봉지를 모두 찢었다. 그리고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성수는 아내의 옆에 누워 이불을 당겼다. 그리고 유진의 감은 눈에 입을 맞췄다.

      <조금 있다 봐, 나도 갈게.>

      성수는 차갑게 식은 유진의 손을 꼭 잡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