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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지는 휘미에게 몸을 돌려 물었다.

“ 휘미, 우리 꼴좀 생각해봐 ”

“ 생각해본 적이 없어. ”

휘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메지는 힘겹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휘미는 예전 기억들을 떠올려보다가 덧붙여 말했다.

“ 살아만 남는다면 좋으련만... ”

“ 살 수 있을까. ”

메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멀리 눈보라 사막을 바라보았다.

“  당장 할 게 있잖아. ”

휘미는 감각이 없는 손으로 품속을 뒤져 풀을 만져보았다. 풀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한참을 그 상태로 누워있었다.

“ 뭐하고 있어? ”

기삭의 물음에 휘미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고개를 저었다. 나뭇가지 위로 힘겹게 불이 타고 있었다.

다음날 휘미는 어둠속에서 눈을 떴다. 사실 그는 잠을 자지 못했다. 추위와 고통을 계속 느끼면서 정신을 완전히 풀어놓기란 쉬운일이 아니었다. 꿈을 꾼건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눈을 뜬것도 그렇게 비몽사몽 하던 도중이었다.
그는 눈앞에 모닥불이 아직 타고 있는것을 확인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팔다리가 멀쩡한지 한번씩 꼼지락 거린 뒤 바윗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기삭과 메지는 아직 누워 있었고 디로단은 모닥불에서 등을 돌린 채 멀리 지나온 산맥을 주시하고 있었다.

“ 디로단. ”

휘미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불렀다. 그는 대답대신 하늘을 쳐다보더니 모닥불 옆의 물통을 가리켰다. 휘미는 물을 몇 번 삼킨 뒤 그에게 다시 말했다.

“ 안 잔거에요? ”

디로단은 여전히 시선은 고정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휘미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뭔가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디로단은 계속 먼 산맥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대신 메지와 기삭을 흔들어 깨웠다. 예상대로 다들 자고 있지 않았다. 휘미가 기삭의 어깨근처에 손을 가져다대자 그가 준비했다는 듯 말했다.

“ 싯딜과 용병생활 할 적에도 한번 이런적이 있었지. 그때 나를 빼고 열두명이 롯샤르의 사막을 가로질러 달아났어. 사흘 밤낮을 걸으니까 말라 죽기직전에 마을이 보였다. 마을 변두리에 다다르자마자 왠 큰 물웅덩이가 보이길래 다들 허겁지겁 마셨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양잿물 터였지 뭐야. ”

디로단은 손을 뻗어 그를 일으키며 대답했다.

“ 사막과 원수지셨군. ”

디로단은 앞서서 눈보라 사막을 향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두 학생도 일어나 그를 뒤따라갔다. 이제 발의 굳은살마저 얼었는지 걷는데에 전혀 감각이 없었다.
고통이 얼어붙고 있었다.

셋째날 새벽, 드디어 산맥을 벗어나 눈보라 사막에 도착한 이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산맥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갑자기 눈보라 사막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마치 자궁속의 태아가 밖으로 나와 처음 세상을 바라보는 감회와도 같았다. 어둠에 몸을 묻고 잠을 자던 사막은 잠시 뒤 긴 하품을 뒤로하고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사막의 지평선 사방에서 회색의 연기가 피듯 떠오르더니 흐릿한 빛이 마술같은 색깔로 어둠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거대하고도 웅장한 사막의 서곡이었다. 날이 밝아올수록 주변은 더욱 신비함에 가득 찼다. 장척의 눈이 평평히 쌓여 빙원의 연회장을 만들어, 온 천하에 말 못할 감회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평원을 가로지르는 바람은 요정처럼 춤추며 빙원을 노래했고 이따금씩 암석 밑 눈빛에 늘어진 고드름들은 참억새의 이슬처럼 반짝거리며 조명을 비춰주었다. “사메시아여!” 일행은 저절로 신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아직 세상은 완전히 재 색깔을 찾지는 못하고 어둠에 기대어 있었다. 그러나 또 어느 순간에 다다르자 하늘과 사막의 경계에서 마치 절대자가 그 틈 사이로 눈부신 얼굴을 내밀듯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행은 빛의 유도에 이끌려 발을 움직였다.
하지만 아름답다고 걷기까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곳곳에는 기괴한 언덕들과 구멍이 뻥뻥 뚫린 울퉁불퉁한 자형들 투성이어서 모래사막보다도 훨씬 걷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말 하지 않고 사막의 짙은 눈바닥을 밟아나갔다. 어느 순간부턴가 다들 주변을 볼 겨를이 없이 앞선 자의 발자국만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걸어가도 걸어가도 계속 똑같은 모습의 사막만 나올 뿐 그 끝은 보이지 않았다. 같은곳을 계속 돌고있다는 불안한 착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치 신의 체스판에서 신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걷는 시늉만 하고 있는것 같았다.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메지도 뿌리를 씹으며 있는 힘껏 앞으로 향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피로감은 계속해서 쌓여만 갔다. 그럴수록 자신감도 점점 사라져갔다. ‘과연 건널 수 있을까?’ 그는 주저앉을 것 같은 느낌을 몇 번이나 떨쳐버리고 앞으로 향했다. 온 신경은 두 다리에 가 있어서 주변의 사물은커녕 몸이 전부 사라지고 다리만 남은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주변은 뿌연 눈안개로 가득 찼고 앞사람의 발자국은 갈수록 희미해졌다. 메지는 앞사람의 기척만 믿고 걷다가 발을 헛디디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로 뒤에 있던 휘미가 젖 먹던 힘을 다해 디로단을 불렀다. 메지는 억지로 다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지만 이미 다리에는 전혀 감각이 없었다. 안개가 심해 네 사람이 나란히 손을 붙잡고 기삭과 디로단이 양쪽에서 메지를 부축하고 걷기 시작했다. 기삭이 한쪽팔로 수통을 따 메지의 입에 물을 넣었지만 그는 삼킬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태양이 대지를 향해 보내준 빛은 안개들 사이로 녹아내리듯 가라앉았다. 휘미도 슬슬 속도가 느려지면서 발걸음이 불규칙해 지더니 앞으로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백색의 사막은 서서히 그의 몸에서 팔과 다리의 감각을 약탈해 가고 있었다. 안개속에서 어느순간 갑자기 높은 둔덕이 나타났고 근육이 굳어버린 휘미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엎어졌다. 그는 엎어진 채로 오르막을 기어 올라갔다. 조금씩,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서 움직이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힘에 다다르게 되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눈동자에 빛이 들어온 듯 순간적으로 온몸에 기운이 나는것이 느껴졌다. 그 힘은 매우 순수했으며 한번도 그가 사용해 보지 않은 힘이었다. 그는 바로 이것이 최초이자 최후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차분한 마음으로 그 힘을 사용했다. 힘을 다 사용할 때 쯤, 커다란 기둥이 머리에 와 살며시 부딪히는 것을 느꼈고 그는 그대로 눈 속으로 쓰러졌다.

적월
 「붉은 달. 6～10일. 비나 눈이 오거나 안개와 구름이 낀다. 만물에 변화가 생기게 하는 달. 적월은 방랑과 여행자의 달이다. 감성을 자극하는 달이기도 하며 적월이 뜬 날은 소리가 다른 때보다 멀리 퍼진다.」

“ 전술 자체로만 따져보면 흐로게도 진형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 떨었다는군. ”

“ 그러면 뭐해. 다 죽었잖아. ”

“ 칼을 든 갓난애기가 나뭇가지를 든 어른에게 달려든 격이지. ”

“ 나뭇가지라니, 흐로게라는 장수는 쇠망치를 든 거인이래. ”

사핀으로 이어지는 관문도시, 그러나 현재는 위머의 보조도시 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시세움에는 많은 병사들이 몰려 있었다. 평소의 떠들썩한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두꺼운 서류 대장을 들고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공무원이나, 군사장비를 쉴 새 없이 나르는 마차와 수레들의 존재는 시세움의 평소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연출했다.
도시 중앙에 위치한 회색광장의 한 모퉁이에서 잡담을 하던 세 지원병들은 멀리 광장 반대편에서 들린 호각 소리를 듣고는 그쪽으로 향했다.

“ 어디서 오셨소? ”

30살정도 되어 보이는, 수염을 듬성듬성 기른 한 덩치 좋은 사내가 옆에 걸어가던 냉랭한 인상의 젊은 청년에게 물었다. 청년은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걷다가 그가 질문하자 표정을 펴고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 …난 정원사요. ”

사내는 기다렸던 대답이라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어깨를 한번 치며 말했다.

“ 허허! 이거 난리가 났구만. 난 피색장(皮色匠)이었소! 세상에 이런 군대가 어디있단 말이오? 이러다간 집행자들까지 용병질을 하러 오는게 아닌지 모르겠네! ”
사내는 청년이 별 반응이 없어 보이자 시선을 돌려 주변의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려 왁자지껄 웃어대었다.

“ 국가가 거짓말을 할리는 없지만 한번 전쟁을 참여하면 10년치 식량을 준다는데! 이거 원 거의 반 강제 동원이 아니겠소? ”

“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둘째 치고 이렇게 사람들을 유혹해서야 누가 집을 내팽개치지 않고 오겠냔 말이오. 허허. 뭐 배가 부른 공무원들이 아니고서야. ”

“ 이보시오! 난 그림을 그리다가 나왔소! ”

“ 난 건물을 짓다가 이렇게 나온거요! ”

청년은 주변에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어 떠들썩해지자 낮게 코웃음을 친 뒤 등을 돌려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그의 옷 위로 빠져나온 뒷목에는 기다랗고 깊숙한 상처가 살짝 빠져나와 있었다.

잔질은 굳은 얼굴로 브리핑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제 그는 완전히 회복되어 다시 수많은 장교들을 거느리고 회의실에 앉아있었다.

“ 적군이 스니게치 성에서 시세움으로 오는 데는 세 갈래 길이 있습니다. 위쪽으로는 산맥과 연결된 좁은 혈로가 관을 통해 있고 아래쪽으로는 해안의 절벽길을 따라 연결된 산길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앙길은 과아 강을 넘어 비교적 평탄한 초원으로 되어있지만 비가 오면 범람이 자주 되는 지역입니다. ”

“ 좋소. 지형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각 관문에 파발을 띄워 놈들의 행동을 주시하도록 하시오. 적의 행로에 따라서 전쟁의 뿌리부터 바뀔 테니까. 반드시 먼저 지형을 선점해야 합니다. ”

잔질은 손에 낀 깍지를 풀고 양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 반드시 ”

“ 휘미 휘미 ”

체루디는 개였다. 왜그런지 모르지만 휘미는 체루디가 개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엎드린 채로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휘미는 피식 웃고는 새하얀 길을 따라 걸었고 그녀는 뒤를 졸졸 따라갔다.

“ 하늘을 직접 그려본 적 있나? ”

디로단은 휘미의 팔을 잡았고 순간적으로 세상이 바뀌었다. 처음 보는 곳이었다. 주변은 매우 소란스러웠고 냄새는 역하고 퀴퀴했다. 체루디는 쥬디하에게 안겨 땅속에 반쯤 묻힌 그녀의 뺨을 핥고 있었다.
‘이렇게 해봐’ 디로단은 그말과 동시에 하늘로 빨려 올라갔다. 휘미는 몸이 뜨는것을 느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나스치가 하늘 위에 위태롭게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휘미는 말했다.
“ 나스치 힘들어? ”
나스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휘미는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밑을 보는 순간 자석에 이끌리듯 다시 밑으로 떨어져나갔다.

휘미는 눈을 뜨는 순간 온몸이 꼿꼿하게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제일 먼저 마비가 풀어진 곳은 머리였다. 엄청난 두통이 머리를 조여 왔지만 다른 곳의 감각이 전혀 없어서 인지 그렇게 괴롭지는 않았다. 그가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인식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머리는 딱딱한 나무로 받혀져 있었고 바닥은 거친 삼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꽤 넓은 집이었지만 아무런 가구나 장식도 없었다. 다만 한쪽에 식량으로 보이는 커다란 보따리들이 잔뜩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복장은 그대로였다. 살아있는건가? 그는 잠시 궁금했지만 어쨌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고개만 돌려 집안을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 메지가 죽은듯이 누워 있었고 멀리 흐릿하게 사람의 모습이 하나 더 보였다.

“ …는 거요? ”

휘미는 그렇게 들었다고 생각했다. 귀의 감각도 천천히 열렸다. 바깥에 휘몰아치는 눈보라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휘미는 눈을 찡그려 사람쪽을 바라보았다. 잘못 본 것일까? 휘미에게 말을 건 자는 밧줄에 묶여 있었다. 그는 휘미가 아무 반응이 없자 다시 말을 걸었다.

“ 도대체 뭐하자는 거요? ”

휘미가 제대로 들었다면, 그는 사핀말을 하고 있었다. 휘미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끝도 없는 통증이 서서히 느껴져 왔지만 그보다는 궁금한 것이 먼저였다. 때마침, 문이 열리면서 커다란 물체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확실히 아는 자였다. 디로단이었다. 디로단은 사핀인에게 다짜고짜 화를 내려다가 휘미가 깨어 있는것을 보고는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휘미가 디로단에게 무언가 물으려고 하자 그는 대충 설명하고는 소리쳤다.

“ 별로 설명할 시간이 없어. 받아. ”

디로단은 다급하게 두리번거리더니 집구석에 놓여있던 거대한 곡괭이를 그에게 던졌다. 휘미는 어떤 상황인지 영문도 모른 채 곡괭이를 받고 서 있었다. 그때 문이 한 번 더 열리면서 자루가 쏟아지듯 방안으로 한 사람이 쓰러지며 들어왔다. 기삭이었다. 그는 몸부림 치듯 일어나며 외쳤다.

“ 왔어! 놈이 왔어! ”

그러자 디로단 마저도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핀인은 한심하다는듯 비웃으며 말했다.

“ 당신들 오늘 여러번 실수한거요. ”

디로단은 그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당겨 단검을 목에 가져다대었다. 의자에 묶여있던 그의 몸이 한꺼번에 같이 들렸다.

“ 말해. 어떻게든 다루는 방법이 있을거 아니야! ”

사핀인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 사미잇을 길들일 수 있을 거란 얘기요? 허허, 그럴 수만 있었으면 난 이미 부자가 됐겠지. 아니 아마 이곳에 도시를 만들었을 거요. ”

휘미는 사미잇이라고 속발음을 굴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사핀의 극한지방에는 사미잇이라는 갯과 동물이 있다. 주둥이가 길고 귀는 곧으며 꼬리가 짧고 새하얀 털에 검은 줄무늬가 있다. 추운곳에서 때지어 산다. 덩치는 다른 갯과 동물보다 훨씬 크며 이빨은 방금 담금질한 칼날보다도 날카롭고 턱뼈는 무쇠보다도 단단하며 뛸 때는 번개같이 민첩하다. 매우 영리하고 자유로운 성격이여서 사람에게는 절대 길들여지지 않는 갯과의 제왕이다. 선공을 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영역을 먼저 침범하면 가차없이 달려든다. 다 자란 사미잇 하나는 장정 다섯은 있어야 쓰러뜨릴 수 있다. 일반갯과와 구분짓는 법은 등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지 보면 되지만 그 수가 매우 적고 인적이 드문 곳에 살기 때문에 마주칠 일은 거의 드물다」

휘미는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것이 느껴졌다.

“ 사미잇이건 뭐건 옆구리에 칼집을 내면 되는거 아니겠어? ”

기삭은 크게 으름장을 쳤지만 바깥에서 사미잇의 실체를 알고 난 뒤로 겁이 안날 수가 없었다. 결국 디로단이 가장 선두에 서있고 뒤쪽에 휘미와 기삭이 나란히 선 채로 대문을 노려본 형태로 진형을 짰다. 디로단은 사핀인이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보고는 그의 밧줄을 풀고는 제일 앞에 세우며 말했다.

“ 저걸 상대해본 적이 있을테지 ”

“ 투기장 우리에서 사람 뱃가죽에 구멍을 내는 것은 본 적이 있소만. ”

디로단은 그의 목에 단검을 겨누고는 다시 말했다.
“ 똑바로 얘기하지 않으면 당신도 그렇게 해주지. ”

“ 내가 무슨 투기장 포획꾼도 아닌데 저 괴물을 왜 마주쳤겠소? ”

그는 입가에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면서도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날카로운 발톱 같은것이 대문을 몇 번 긁는 소리가 났다. 일행은 저마다의 무기를 앞세우고 자세를 낮추었다.

“ 빌어먹을. 다 탈출해놓고선, 여기서 죽겠나? ”

기삭이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디로단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문앞으로 한걸음 다가가 발로 대문을 살짝 열었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대문은 열렸고 눈보라가 집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디로단은 고개를 빼어 사미잇의 발자국을 찾았지만 어느새 눈속에 파묻혔는지 보이지 않았다. 기삭이 또 무언가 얘기 하려는 순간 이번에는 일행의 뒤편 나무벽을 밖에서 긁는 소리가 들렸다. 일행은 전부 깜짝 놀라 엉덩이에 불이 난 듯 뒤를 돌아보았지만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 끄으응 ”

조그만 개가 신음하는 소리가 문밖으로 들렸고 일행은 고개를 동시에 돌렸다. 바깥에는 다 자란 여우 크기만한 짐승 하나가 맑은 눈으로 집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거였어?’ 휘미는 한편으로 마음이 놓이면서도 주변사람들이 얼어붙은 듯 꼼작도 하지 않자 곡괭이를 양손으로 꼭 쥐었다. 사미잇은 멀뚱히 문 안쪽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한걸음에 도약하여 문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휘미는 사미잇이 거의 순간이동을 했다고 생각했다.

“ 피해! ”

디로단의 외침과 함께 일행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미잇은 상상하지도 못할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꺼내며 가장 가까이 있던 디로단에게 달려들었고 디로단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의 왼쪽 팔 소매는 살이 들어날 정도로 찢어져 있었다. 디로단 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보통 사람이었다면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갈 속도였다. 디로단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사미잇의 꼬리를 있는 힘껏 붙잡았고 놈이 그의 손을 물려하자 재빨리 목덜미를 눌렀다. 하지만 사미잇은 그렇게 쉽게 잡힐 짐승이 아니었다. 엄청난 힘으로 발버둥 치며 그의 몸에서 빠져나가더니 휘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칠게 메지의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기삭이 소리쳤다.

“ 휘미 뭐해! ”

휘미는 대답하지 않고 메지의 옷을 아예 풀고는 온몸을 더듬더니 이윽고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디로단의 눈이 커졌다.
사미잇은 휘미에게 달려들기 위해 자세를 낮췄고 그때 기삭이 작살을 사미잇의 머리를 향해 집어던졌다. 사미잇은 쳐다보지도 않고 여유롭게 피한 뒤 이번엔 기삭을 바라보았다.

“ 우아악! ”
그사이 휘미는 갑자기 고함을 지르더니 머리를 움켜쥐고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 뚜껑이 열린 병이 굴러 내렸다. 숨소리는 전력질주를 한 직후처럼 거칠어지고 얼굴에 심줄이 일어나더니 온몸에 홍조가 일어났다. 눈에는 핏줄이 섰고 턱뼈가 부러질 듯 이를 꽉 다물며 갈았다. 그는 비명소리와 함께 사미잇에게 달려가더니 맨손으로 짐승의 허리를 붙잡았다. 끼응 소리와 함께 붙잡힌 사미잇은 디로단에게 붙잡혔을 때 처럼 발버둥을 쳤지만 휘미가 꼬리를 무릎으로 누르고 양 팔꿈치를 등뼈 양쪽으로 찍은 채로 손바닥으로 목을 붙잡자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휘미는 눈물까지 흘리며 온몸에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 포획할 만한걸 찾아! ”

재정비를 한 디로단이 소리쳤고 그와 동시에 사미잇은 온몸을 낮추더니 갑자기 도약했다. 휘미를 그대로 등에 업고 도약을 한 것이었다. 엄청난 힘이었다. 결국 휘미도 사미잇을 놓치고 벽에 부딪혀 떨어지고 말았다. 창고 더미 위로 단번에 도약한 사미잇은 자세를 낮추고 으르렁 거리며 일행을 바라보았다. 사핀인은 기겁하여 구석에 달라붙은 채 전투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디로단은 숨을 몰아쉬며 그에게 말했다.

“ 보자기나 그런거 없소? ”

“ …놈이 지금 광주리 위에 올라가있소 ”

디로단은 다시 한발짝 앞으로 나오더니 자세를 낮추고 정면으로 사미잇을 바라보았다. 사미잇은 뭍짐승들이 으래 하는 시선제압 조차 하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고 있긴 했지만 매우 평안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디로단의 얼굴이 더 사납게 보였다. 살기하나 없는 위기. 그것은 사미잇이 더욱 공포로 작용하는 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미잇의 행동이 이상해졌다. 졸린 듯 꾸벅꾸벅 머리를 숙이기 시작하더니 자꾸 엎어질것 같이 비실거렸다. 마치 술에 취한것 같은 표정이었다. 기삭이 용기내어 디로단에게 물어보았다.

“ 대체 어떻게 된 거야? ”

그러나 디로단도 고개를 살짝 저을 뿐이었다.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사미잇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았다. 사미잇은 완전히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엎드려 앉았다.

“ 계략일지 몰라. ”

기삭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디로단은 한걸음씩 앞으로 이동하면서 사미잇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가 한걸음 나아갈 때마다 귀를 조금씩 움직이는것 외에는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살기를 나타내지 않는 동물이기 때문에 어떤 속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디로단이 한발자국 앞까지 다가가는 데에는 지루하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휘미는 온몸을 태우는 듯 했던 열기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긴장되었던 온몸의 근육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온몸에 쌓인 피로와 통증들이 다시 그의 몸을 휘감았다.
디로단은 결국 사미잇의 코앞까지 다가갔고 사미잇은 고개를 빼어 그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다리에 힘을 주고 그의 얼굴로 와락 달려들었다.

“ 안돼! ”

휘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더 이상 눈을 뜨기 싫었다. 산산 조각난 디로단의 얼굴을 상상하는것은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아 그때 나는 왜 풀을 꺾었을까?’ 영문도 모른 채 도망갈때도, 군대에 어처구니없이 휩쓸려 들어왔을 때도, 회전에서 패했을 때도, 기괴한 법칙에 의해 동료들이 죽어날 때도 미쳐 생각나지 않던 후회의 감정이 처음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번 생각의 물꼬가 터지자 그는 주체할 수 없이 괴로운 감정에 휩싸여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비약의 후유증과 함께 현기증이 일어나 그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바로 옆에서 사핀어가 들렸다.

“ 이건 말도 안돼. 이건 정말! 말도 안돼! ”

“ 하하하! 맙소사. ”

휘미는 기삭이 허탈하게 웃어대자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슬며시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는 믿지 못할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사미잇이 디로단을 올라탄 채 그를 핥아주고 있었다. 여전히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언제 그와 싸웠냐는 듯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듯 하였다. 디로단은 겨우 짐승을 때어내고 휘미에게 갔다. 기삭이 휘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 휘미 괜찮아? 대체 뭘 먹은거지? ”

휘미는 몸을 일으키고는 말했다.

“ 괜찮은것 같기도. 굉장히 짜릿하군. ”

디로단도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사핀인이 광주리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 이럴수가 이럴수가! 그동안 수천명의 사핀인들이 사미잇을 길들이기 위해 애썼는데... 어떻게 한번에 가능했던거지? ”

사핀인은 흥분하여 소리쳤다. 정말 영문 모를 일이긴 하였다. 디로단이 사미잇을 진정시키고 일어섰을 때쯤, 기삭이 창고더미로 가서 보따리를 살펴보았다. 그건 풀이 가득 든 광주리였다.
이번에 놀란것은 휘미였다.

“ 어라? ”

분명 많이 보던, 그러나 실제로는 처음 보게된 풀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풀의 이름을 잊을 수 없었다. 워낙에 유명한 풀이었으니까.

“ 처녀이끼! ”

처녀이끼 수백 포기가 마치 잡초라도 되는 양 서로 뒤엉켜 커다란 보따리 안에 방치되어 있었다. 소문대로 여성의 생식기를 닮은 독특한 생김새였다. 다이지에서는 한 포기만 있어도 교수들 여럿이 달려들어 조심스럽게 보호하고 관리하는 풀이 수없이 뒤엉킨 채 방치되어 있자 휘미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디로단은 사핀인을 보고 말했다.

“ 저 풀 때문이오? ”

“ 글쌔 나도 모르겠소. ”

디로단이 인상을 구기며 그에게 다가가자 사미잇 또한 그르렁 소리를 내며 사핀인에게 이를 드러내 보였다. 사핀인은 놀라 말했다.

“ 정말 모르겠소! 나는 원래 풀을 캐서 중간업자들에게 거래만 시키는 사람이올시다. ”

“ 저 풀이 뭐에 쓰는것이오? ”

“ 보면 모르겠소? 환각제요. 이쪽에서는 바니시 라고 불리는 비싼 풀이오. ”

“ 바니시라... ‘하룻밤의 사랑’ 이란 뜻이군. ”

휘미가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기삭이 다그쳤다.

“ 제기랄.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풀을 캐는 놈이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

그러자 사핀인이 답답하다는 듯 기삭을 쏘아보며 답했다.

“ 녀석들은 밤에는 돌아다니지 않는단 말이다. 그런데 당신들이 갑자기 사막에서 나타나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노출이 되어버렸으니! 녀석들이 때거지로 우릴 발견하지 않은게 다행인 줄 만 알아. ”

휘미는 풀을 들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처음엔 매콤한 향이 톡 쏘는 듯 했으나 좀 더 깊게 빨아들이자 감미로운 향기가 느껴졌다. 이루 말 할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숨을 한번 들이켰는데도 몸의 모든 근육이 이완되고 나른해져 마치 구름 속에 빨려들어 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고개를 마구 휘저어 정신을 차리고는 처녀이끼를 다시 보따리에 쑤셔 넣었다. 휘미가 말했다.

“ 처녀이끼 때문에 저 괴물이 저렇게 얌전해진 것은 확실하군요. ”

“ 휘미. 얌전해진 것 뿐만이 아니야. 저걸 봐. ”

사미잇은 이제 아예 디로단의 다로기에 턱을 올리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사미잇은 겉보기나 행동으로만 봐서는 보통의 개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들이 계속 윔어로 무언가를 상의하자 사핀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멀리 떨어져 있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 났다는듯 말했다.

“ 근데, 당신들은 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오? ”

네 탈줄자는 온몸의 괴로움들이 밖으로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몸을 간단히 씻을 뒤 장작불에 물을 데워 옷을 삶았다. 풀이 아닌 제대로 된 사핀 음식을 먹게 되자 기삭은 눈물까지 흘릴 참이었다. 메지도 조금 전에 일어나 영문도 모른 채 착해진 사미잇과 놀고 있었다. 휘미는 소금 간이 밴 양고기를 씹었다가 도로 밷었다. 기삭이 웃으며 말했다.

“ 아직 씹기 힘들 걸. ”

네 탈출자는 화기애애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음식을 나눠먹었다. 사핀인은 의자에서는 일어났지만 여전히 발목을 묶인 채 구석에서 우두커니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심사가 뒤틀린 기삭이 사핀인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 네놈들 때문에 우리가 이꼴이 되었다! 이 빌어먹을 놈아! 네놈도 삼각형에다가 가둬놓고 내키는대로 괴롭히다가 죽여줄까? ”

사핀인은 오히려 더 화를 내며 되받아쳤다.

“ 뭐, 난 전쟁따위는 일어난 줄도 몰랐어. 국가와도 상관이 없고. 그리고 난 당신들 때문에 지금 내 식량도 뺏기고 밧줄에 묶여 있지. 사미잇 발톱에 얼굴이 날아갈 뻔도 했고. 죽을 고생 하면서 몇 년간 모은 내 바니시를 뺏기게 생겼고. 누구 꼴이 더 참담해 보이나?”

기삭은 시뻘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휘미가 말했다.

“ 그래도 당장에 드는 생각은, 당신을 절대로 보내줘서는 안된다는 것 뿐이에요. ”

“ 맞아. 더러운 사핀인인 네놈을 보내줬다가는 저 풀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할 지 모르지. ”

기삭은 사핀인을 못살게 굴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사핀인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디로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핀인의 얼굴이 다시금 하얗게 되었다. 디로단 옆에서 으르렁 대는 사미잇과 또 눈이 마주친게 분명했다. 디로단은 좀 다른 말을 했다.

“ 이보시오. 보통 이 풀 하나가 얼마나 효과가 지속되지? ”

“ 열시간 정도. 근데 보통은 풀잎 하나만 끓이면 열 명 정도가 흡입을 할 수 있지. ”

“ 개는? ”

“ 개한테 이걸 왜 먹이겠소? ”

“ 앞으로 계속 먹이게 될것 같아서. ”

메지는 디로단이 말한대로 사미잇에게 양고기 덩어리를 내밀면서 속에 처녀이끼 풀 하나를 끼워 주었다. 사미잇은 배고팠는지 한입에 삼키고는 잠시 흐느적대더니 다시 디로단 곁에 얌전히 앉았다. 메지가 말했다.

“ 근데 여긴 어디죠? 사막을 다 건너온건가요? ”

“ … ”

메지는 사핀어로 친절하게 물었고 사핀인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전부 알려주지. “

“ 배신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안 죽이겠죠? ”

휘미가 기세 좋게 대답해 주었다. 사핀인은 재밌다는 듯 그를 한번 바라보더니 자신의 발목을 들어보았다.

“ 그럴 일 없을테니 우선 이것부터 좀 풀어보시오. ”

“ 어떡할까요? ”

“ 풀어줘. 대신 풀에 손만 못대게 하면 되잖아. 어때? ”

디로단이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기삭이 못마땅한 얼굴로 손을 꺾으며 음산하게 말했다.

“ 그럼 이제 손가락을 부러뜨려 놓을 차례인가? ”

사핀인은 상관 없다는듯 멀뚱히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디로단이 단검을 이용해 밧줄을 잘라내었다. 사핀인은 그제야 몸의 관절을 풀더니 정식으로 일행에게 인사했다.

그는 자신을 발리율이라고 소개했다. 공장을 운영했지만 가나씨 코퍼레이션 때문에 국가 지원이 끊긴 뒤 가족을 떠나 한참을 도망다니다가 바니시에 손을 댔다고 했다.

“ 듣고보니 웃기는군. 국가에서 지원이 끊겼다고 무조건 공장문을 닫았나? ”

기삭이 비이냥 대는 말투로 윔어로 한마디 던졌다.

“ 사핀에서는 모든게 빌어먹을 만큼 철저하게 국가랑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내 몸도. 절대 자유롭지 않아. 도망다니고 있다고 말했지 않나. 나는 절반은 죽은 사람과 같다. ”

발리율은 기삭이 한 말의 뜻을 대충 알아들은 듯 그렇게만 말한 뒤 입을 닫았다. 일행은 궁금한게 많았지만 그가 자꾸 대화를 끊자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다. 참다못한 휘미가 말했다.

“ 참나. 혀에다가 보석이라도 감춰놨나 왜 입 열기를 싫어하나요? ”

“ 멍청한… 난 말하는데 익숙하지 않아. 이곳은 무슨말만 하면 교수형에 처해지는 나라니까. ”

메지는 긴장이 풀어지는지 길게 하품을 하고는 화로 곁에 바짝 다가가서 다시 누웠다. 그는 옴이 난 부분을 약초로 문지르고는 삶은 그의 옷으로 흉부를 닦아내었다. 휘미도 금세 다시 피로가 몰려오는지 다시 몸을 뉘였다. 그는 불타는 화로를 비스듬히 바라보다가 디로단에게 말했다.

“ 디로단. 혼자 또 깨어있을건가요? ”

“ 여긴 아직 안전하지 않아. 옷이 다 마르면 저자가 말한 ‘오윰’ 이란 곳에서 푹 자도록 하지. ”

“ 교대로 깨어있는 편이. ”

그러나 휘미는 그 말과 함께 다시 잠들었다. 도무지 얼마나 잔지 몰랐다. 이전까지가 고통의 어둠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엄쳤던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진정으로 깊은 잠에 빠졌다.
그가 다시 일어났을 때는 주변의 다른 이들이 분주하게 짐을 챙기고 있었다. 창문이 없어 짐작을 하진 못했지만 분명 밤이라고 생각되었다. 사미잇이 꼬리를 흔들며 디로단의 뒤를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걸로 보아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꿈이 아닌것이 확실했다. 휘미는 다시 몸에 힘이 솟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시 가로소인의 옷을 입고 다로기를 신었다. 그리고 발리율을 앞장세운 뒤 밖으로 향했다.

“ 달은 어디든 존재하는군 ”

선명한 붉은 색으로 불타오르는 적월이 밖으로 나온 일행을 반겼다. 발리율은 동쪽에는 날라산맥이 이어지며 그곳이 바나시의 생산지임과 동시에 사미잇들의 본 주거지라고 했다. 그는 그 렇게 한마디만 던진 뒤 천체를 대충 훑어보고는 방향을 잡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제 추위에 이골이 난 세 윔인과 한명의 앗사나인은 여전히 휘몰아 치는 눈보라에 몸을 잔뜩 움츠렸지만 발리율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눈밭을 걸어갔다. 물론 디로단 뒤를 가벼운 발걸음으로 따르는 짐승 한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사핀어를 못하는 기삭이 불평하며 윔어로 소리쳤다.

“ 이자식 우리를 사미잇들 서식지로 대려가는거 아니야? ”

발리율은 이제 아예 그의 목소리를 무시 한 채 계속 걷기만 했다. 한참 뒤 그는 걸음을 늦춰 일행과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 동이 트기 전까지 오윰 안으로 들어갈거요. ”

“ 거긴 어떤 곳이오? ”

디로단이 물었다. 그러자 발리율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 위와 아래, 낮과 밤이 전혀 다른 곳이지. 있을건 다있으니 걱정마시오. ”

“ 우린 돈이 없소. ”

발리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또 대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래서 어쩔거냐는 투의 다소 무례한 방식의 반응이었다. 기삭이 그와 걸음을 맞추더니 귀에다가 바짝 대고 윔어로 속삭였다.

“ 아까 듣자하니 투기장이 있던데 네놈을 동물대신 거기다가 팔아 돈을 벌어야 겠다. ”

발리율은 이번에는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기삭을 한대 칠 듯 돌아보았다. 기삭은 기다렸다는듯 이를 갈았고 나머지 세 사람이 모두 중재에 나섰다. 간신히 진정하자 휘미가 그를 설득했다.

“ 발리율 우린 당신 도움이 필요해요. 당신이 믿음만 준다면 우린 당신을 동료로서 대할 수 있을 겁니다. ”

발리율은 인상을 구겼다. 휘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 사핀인들은 항상 계산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죠. 그리고 현재는 당신이 우릴 사핀 경찰에 팔아넘기고 당신 풀을 되찾고 보상을 받는것이 우리를 도와주는것 보다 훨씬 많은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거에요. ”

발리율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휘미는 오랜만에 머릿속이 핑 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마무리를 지었다.

“ 하지만 멀리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아요. 나와 메지는 다이지라는 유명한 기관의 학자였습니다. 처녀이끼…그러니까 당신이 말한 바니시 보다도 훨씬 특이하고 멋진 풀들을 많이 알아요. 메지? ”

휘미와 호흡이 잘 맞는 메지는 당장 품속 깊은 곳에서 작은 잉크통을 꺼냈다. 이까 비약의 효과를 눈앞에서 본 그는 호기심 가득하게 병을 바라보았다.

“ 이 풀은 우리나라 에서는 정말 귀하지만 어쩌면 사핀에서는 흔한 품종일수도 있죠. 그리고 저희는 이것 외에도 엄청난 효과를 가진 풀을 수도 없이 많이 알고 있어요. ”

휘미의 말에 발리율은 고개를 들고 눈동자를 굴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메지가 옆에서 말했다.

“ 아마 우리랑 다니면 부자가 되는것도 더 쉽겠네요. ”

“ 우리를 팔아 넘기는거 보다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