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인형

명 덕은 얼굴이 살짝 빨개진 채로 포장마차를 나섰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그의 몸을 스쳐갔다. 그 차가운 기운에 그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조금 떨렸다. 명덕은 몸을 살짝 움츠렸다가 이내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의 생각이 남기고 온 골뱅이 몇 점에 미쳤다.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장사가 잘 된 날. 이렇게 술을 마시고 안주를 조금 남기고 오는 것은 그 만의 작은 사치였다. 주인아주머니는 항상 툴툴대지만. 명덕은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어깨에 맨 보따리를 슬슬 만졌다. 거기에는 그의 보물이 들어있었다. 명덕은 약간 풀려버린 보따리를 추켜 메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짐은 포장마차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흐응 흐응 하던 그의 콧노래가 갑자기 뚝 멈추었다.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의 손으로 눈을 비볐다. 헛것이 보일정도로 많이 마시진 않았는데… 그는 발걸음을 빨리해 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다가갔다.

여 덟 살이나 되었음직한 여자아이였다. 소녀는 웬만한 어른에게도 클 것 같은 낡은 외투를 한 장 걸치고 골목길에 주저앉아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명덕은 누굴 기다리는 걸까 하고는 주위를 휙 휙 둘러보았다. 그러나 낮에도 한산한 골목길에 이 늦은 시각에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모님 기다리니?”

명 덕의 물음에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자신이 굉장히 수상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소녀의 눈에는 전혀 경계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명덕은 그제야 마음을 편히 먹고 재차 질문했다.

“여기서 누구 만나기로 했어?”

소 녀는 계속해서 명덕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말을 못하는 걸까? 아니. 그렇다면 고개라도 끄덕여 줄 텐데. 자신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소녀를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 때 그의 귀에 무언가 딱딱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소녀의 등이 떨리며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그는 다시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많이 추운가 보구나.”

이번에도 역시 소녀는 묵묵부답이었다. 명덕은 한숨을 푹 쉬고는 보따리를 내려놓고 점퍼를 벗어 소녀를 덮었다.

“자, 없는 것보단 나을 거다.”

명덕은 다시 보따리를 멨다. 소녀는 여전히 그를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었다. 명덕은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고는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명 덕은 집으로 들어오며 전등을 켰다. 그의 집은 조그만 원룸이었다. 그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관리실에서 보일러를 세게 틀어주는지 방바닥은 꽤 따뜻했다. 잠시 바닥의 따스한 감촉을 즐기다가 명덕은 일어나서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 안에 들어있는 것은 나무로 깎아 색을 칠한 듯 한 조잡해 보이는 인형들이었다. 명덕은 놓여있는 도색물감을 끌어와 붓에 묻혔다. 그리고는 색이 바래진 인형들을 골라 정성들여 색을 덧칠하기 시작했다. 회색이 되어가던 신랑인형의 양복이 다시 검어지고, 소년 인형이 차고 놀던 축구공이 다시 제 색을 되찾았다. 명덕은 어느새 씻는 것도 잊은 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얼 마나 지났을까, 명덕은 눈이 침침해 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깜빡였다. 계속 같은 자세로 있었더니, 어깨도 조금 뻐근했다. 그는 두 손을 잡고 기지개를 쭈욱 켰다. 기지개와 동시에 입이 벌어지며 하품이 나온다. 자야겠어. 명덕은 불을 끄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며 슬쩍 시계를 보니 벌써 한 시다. 그는 인형들을 한쪽으로 밀었다. 소녀 인형하나가 다른 쪽으로 퉁겨나간다. 명덕은 소녀 인형을 주워들어 다른 인형들이 밀려간 곳에 놓았다. 순간.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명덕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그는 황급히 집을 나섰다.

“이런!!　역시..”

멀리 가로등 아래 명덕의 점퍼가 보였다. 그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의 짐작대로 점퍼 밑에는 아직도 소녀가 있었다. 그는 황급히 새근새근 자는 소녀를 깨웠다.

“야!!야!!일어나! 이렇게 추운데 함부로 잤다가 죽어 임마! 야!”

다행히 소녀는 잠들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큰 눈을 떴다. 명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녀는 졸린 눈으로 명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새파래져 있었다. 명덕은 무언가 결심을 했는지 소녀를 일으켜 세웠다.

“안되겠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그는 소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소녀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의 등에 업혔다. 그의 복에 소녀의 볼이 와 닿았다. 상당히 차가웠다. 그는 급히 발을 뗐다.

명덕은 가스버너의 불을 끄고 냄비를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냄비뚜껑을 열자 따뜻한 김이 확 빠져나왔다. 명덕은 소녀에게 젓가락을 쥐어주었다.

“배고프지? 너 다 먹어, 난 아까 술 마시면서 배 꽉 채웠으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녀는 젓가락을 라면에 가져가고 있었다. 명덕은 피식하고 웃었다. 소녀는 명덕의 윗도리를 걸치고 있었다. 윗도리라기 보단 큰 원피스처럼 되어버렸지만 아까 외투를 벗겼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었다. 설마 아무것도 안 입고 있었을 줄은..

“안 얼어 죽은 게 용하다, 용해.”

명덕이 혼잣말처럼 내뱉자 소녀가 라면을 먹다 말고 그를 빤히 보았다.

“아무것도 아냐, 얼른 먹어. 식기 전에.”

그러나 소녀는 명덕의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를 빤히 보았다. 명덕은 당황하여 소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이유를 깨달았다.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하나 더 끓여줘?”

소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명덕은 일어서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아냐? 그게 지금 나한테 처음으로 한 의사 표시인거? 내 참.. 기다려. 순식간에 끓여줄 테니..”

소녀가 젓가락을 놓은 건 두 번째 냄비도 깨끗하게 비운 후였다.

“정말 어지간히도 배고팠나 보구나. 라면 두 개는 나도 가끔씩밖에 다 못 먹는다, 야.”

소녀는 명덕의 말에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시선이 한 곳으로 고정되었다. 명덕은 소녀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 그거? 내가 만든 거야. 이쁘지?”

소녀는 몸을 일으켜 인형 더미로 다가갔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옷을 입고 걷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옷이 걸어다니네, 완전히. 소녀는 인형하나를 집어 들어 신기한 듯이 여기저기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명덕은 얼굴에 웃음을 띄운 채로 소녀를 인형더미에서 떼어냈다,

“자자, 이제 그만 자자. 내일 많이 갖고 놀게 해줄게.”

소녀는 인형하나를 집어든 채로 명덕이 깔아놓은 이불에 몸을 뉘였다.

“솜인형도 아니라 푹신하기는커녕 딱딱할 텐데. 뭐, 상관없나? 그럼, 불 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꺼졌다. 명덕은 누워있는 소녀를 밟지 않도록 조심해서 걸어가 방바닥에 몸을 뉘였다. 하나밖에 없는 이불을 소녀에게 덮어주었기 때문에 명덕은 별수 없이 점퍼로 몸을 덮었다. 탁상시계는 두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명덕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요란하게 울리는 탁상시계의 알람소리에 명덕은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소녀의 얼굴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소녀는 깜짝 놀라며 그에게서 한걸음 떨어졌다. 명덕은 몸을 일으켰다,

“뭐야..휴..놀랐잖아. 귀신인 줄 알고..아, 소리 질러서 미안”

명덕은 소녀가 여전히 놀라있는 듯 보이자 손을 들어 사과했다. 그러나 소녀는 여전히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명덕이 당황해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 갑자기 소녀의 뱃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명덕은 쓴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점퍼를 걸쳤다.

“어젯밤에 그렇게 먹어놓고도 또냐? 기다려봐. 얼른 나가서 사올 테니.”

소녀의 눈이 명덕의 운동화로 향했다, 운동화는 꽤 오래되었는지 이곳저곳 닳아 있었다. 명덕은 소녀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신을 신고 콧노래를 부르며 밖으로 나갔다. 소녀는 이내 어제 안고 잔 인형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명덕이 돌아온 것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의 한쪽 손에는 검은색 봉다리가, 다른 쪽 손에는 몇몇 옷가지가 들려있었다. 소녀는 인형 몇 개를 손에 들고 뒹굴거리고 있었다. 명덕은 신발을 벗고 들어와 봉다리와 옷을 바닥에 털썩 내려놓았다.

“늦어서 미안, 배고팠지? 좀 씻고 주인아주머니께 그 집 딸이 입는 옷 좀 빌려 오느라, 자 입어봐. 맞나 봐야지.”

소녀는 잠시 명덕이 가져온 옷가지를 보더니 명덕의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명덕은 뒤로 돌아 가스버너를 끌어와 어제 받아온 물을 냄비에 붓고 버너 위에 올려놓았다.

“다 입었어?”

아 참, 말을 못하지.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명덕은 잠시 기다렸다가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명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덕은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쁘다, 이뻐. 자, 어제 바로 자서 찝찝했지? 1층 내려가면 바로 세면실이 있으니까 씻고 오라구. 난 먹을 거 차려놓고 있을 테니.”

소 녀는 역시 아무 대답 없이 밖으로 나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명덕은 세면장 냄새나니까 적당히 씻고 오라고 소리친 후 봉지에서 햇반을 꺼내 포장을 뜯지 않은 채로 끓는 물에 집어넣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젓가락으로 겨우겨우 햇반을 건져낸 후. 주인집 아주머니께 받아온 김치를 꺼내 뚜껑을 열어놓는다. 거기다 참치캔을 따서 바닥에 내려놓고 잠시 후 명덕은 차려진 밥상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볼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가 돌아왔다. 수건이 없었는지 물방울이 방울방울 붙어있는 소녀의 얼굴은 살짝 찡그려져 있었다. 명덕은 킥킥대며 소녀를 손짓으로 불렀다.

“너 얼굴에 표정 있는 거 지금 처음 보는 것 같다? 냄새가 독하긴 독한가 보네. 자, 앉아. 어젯밤에도 라면 줬는데 오늘도 라면 줄 수 없어서 밥 했다고. 반찬 별로 없어도 맛있게 먹어.”

소녀는 명덕이 뜯어준 나무 젓가락을 집어 들고 음식으로 가져갔다. 역시 아이라는 걸까. 처음부터 계속 손이 참치캔으로만 가는 소녀를 보고 명덕은 웃으며 김치를 한조각 집어 햇반에 올렸다. 밥은 빠른 속도로 줄어갔다. 소녀가 웬만큼 배를 채운 듯 보이자, 명덕은 자신도 젓가락을 들었다. 명덕의 앞에 놓인 밥이 반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은데 그가 젓가락을 놓자 소녀는 명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그가 자세를 고치더니 소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부모님이 안계시니?”

묵묵부답, 소녀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계속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명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물었다.

“어 제는 누구 기다리고 있던 거야?” 역시나 소녀는 전혀 대답도 움직임도 없다. 심지어 표정의 변화조차도 없었다. 이거 마치 내가 만든 인형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잖아. 명덕은 투덜대며 소녀의 눈길을 마주보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시간이 흐르고 명덕의 입이 열렸다.

“그럼, 너 나랑 같이 여기서 살 거야?”

명 덕은 소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덕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명덕을 쳐다봤다. 명덕은 소녀의 손을 잡고 읏차~하며 소녀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 나가자. 쾌활하게 그가 소리쳤다. 그리고는 한쪽이 밀어놓았던 인형들을 보따리에 쓸어 담았다. 소녀는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명덕은 보따리를 인형이 새지 않게 묶고는 어깨에 걸쳤다.

“내가 너를 업어주고는 싶다만, 요놈 땜에 그건 힘들겠다. 그러니까, 잘 따라와야 돼, 알았지?”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놈 봐라, 갑자기 반응이 늘었네. 너털웃음을 짓던 명덕은 순간 자신이 무언가 중요한 걸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보따리를 땅바닥에 내려놓고는 소녀에게 눈을 맞췄다.

“그런데 너 이름이 뭐냐? 계속 야, 너 라고 할 순 없잖냐. 안 그래?”

곧 명덕은 어깨를 훅 내려트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제 반응이 생겼다고 좋아했었는데 다시 목석으로 돌아간 것 같은 소녀는 묵묵부답이었다. 명덕은 땅바닥에 흩어져 있는 종이 한 장을 주워 볼펜과 함께 소녀에게 내밀었다.

“자자, 여기다가 쭉 써봐. 니 이름. 이름 없어?”

끄 덕끄덕. 명덕은 그만 얼빠진 표정이 되어버렸다. 이름도 없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럼 다시 목석이 되어버렸던 게 아니라 이름이 없어서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건가. 아님 잊어버렸다는 건가. 아무리 봐도 자기이름을 잊어버릴 정도의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순간 명덕은 자신이 상처를 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게 재빨리 소녀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인지 소녀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명덕은 속으로 안도하며 재빨리 머릿속으로 한 이름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 이름을 붙여줘도 되는 걸까. 근심스럽게 그가 소녀에게 붇는다.

“그럼 수현 어때? 내가 민씨니까 민수현. 이쁜 이름이지?”

소녀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덕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소녀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향했다. 곧 명덕은 소녀의 신발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혀를 한번 쯧 차고는 소녀더러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밖으로 나갔다. 얼마 안 되어 돌아온 그의 손에는 슬리퍼 한 쌍이 들려있었다.

“어쩔 수 없지. 잠시 화장실에서 슬쩍 했어. 좀 있다 다시 갖다 놓으면 되지. 자, 신어”

소녀는 화장실에서 가져왔다는 말이 걸리는지 머뭇머뭇하다가 이내 슬리퍼에 발을 밀어 넣었다. 명덕은 그 광경을 보고 한바탕 웃은 후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녀가 그의 손을 잡자, 명덕은 휘익~하고 휘파람을 불고는 문을 열었다.

밖 은 마치 어젯밤의 추위가 거짓말이기라도 한 듯이 겨울치고는 상당히 따뜻했다. 명덕은 달랑 원피스 하나에 어제 입고 있었던 외투 하나만을 걸친 소녀를 떠올리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녀를 흘끗 바라보았다. 소녀는 끊임없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밖에 처음 나와 보나. 명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 봐, 저기. 어제 니가 있었던 데다.”

명 덕은 소녀의 손을 잡은 쪽 팔을 잡아끌며 다른 쪽 손으로 골목의 벽을 가리켰다. 소녀는 그의 손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명덕의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잠시 동안 그곳을 바라보던 소녀는 그렇구나-하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덕은 그런 소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표현이 많아진 그녀를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였다. 그렇게 몇 분쯤 걸었을 때, 골목이 끝나고 큰길이 나타났다. 소녀의 고개는 한층 더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명덕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지하철 역 안에 있는 현금인출기였다. 명덕이 호추머니를 뒤져 꺼낸 카드를 기계에 넣고 비밀번호를 누르는 동안 소녀는 동그래진 눈으로 기계를 여기저기 뜯어보기 시작했다.

101,329원.

명 덕은 기계에 적힌 숫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5만원을 입력했다. 그리고 뜨는 확인 메시지. 명덕은 한숨을 쉬며 취소를 누르고 이번에는 10만원을 입력했다. 비상금 다 써버리는 건가. 십만 원이면 방값 빼고 한달 생활비인데. 명덕은 투덜거리며 기계에서 돈을 빼냈다. 망설임은 없었지만 손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는지, 그가 손에 쥔 푸른색 종이가 파르르 떨렸다. 명덕은 돈을 점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소녀를 소리쳐 불렀다. 소녀는 바로 그를 돌아보았다. 명덕이 손을 내밀자, 소녀는 뛰어와 그의 손을 잡았다. 명덕은 소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명 덕이 소녀는 데리고 간 곳은 그들의 내려온 반대편 지하철 출구 쪽에 있는 상당한 규모의 아동복 상점이었다. 명덕으로서는 2년만에 와보는 아동복 상점이었다. 소녀는 상점 역시 신기한지 이리 저리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명덕은 그런 소녀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맞는 나이대의 코너로 데리고 갔다.점원이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명덕은 골라보라며 소녀의 등을 떠밀었다. 소녀는 옷이 쭉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옷들을 이리저리 뒤적이기 시작했다. 점원이 소녀가 옷을 고르는 걸 도와주려고 다가가는 걸 보고 명덕은 여아 신발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쯤 소녀는 점원이 골라준 옷을 입고 마음에 드는지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자신을 비춰보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

소 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 짓는 명덕에게 점원이 이 옷을 입고 갈 건지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점원은 소녀의 옷에서 가격표를 뜯어내 명덕에게 건넸다. 명덕은 가격표를 받아들고 소녀의 손을 잡았다. 소녀의 시선이 그의 다른 쪽 손으로 향했다. 명덕은 분홍색 운동화로 소녀의 머리를 톡톡 쳤다.

“그런 언제까지 슬리퍼신고 다닐래? 그거 원래자리에 되돌려 놔야 착한 어린이지, 안 그래?”

소녀가 그제서야 질질 끌로 다니던 슬리퍼를 내려다보는걸 보고, 명덕은 킥 하고 웃었다.

“전부해서 오만 사천 원입니다.”

계 산대에 점원이 소녀가 입고 왔던 원피스와 슬리퍼를 종이봉투에 넣으며 말했다. 명덕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을 꺼냈다. 그의 손가락이 막 여섯 장 째 지폐를 넘겼을 때 갑자기 그가 소녀를 보고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하더니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잠바 한 벌이 들려있었다. 명덕이 잠바를 점원에게 내밀었다.

“이 것도 같이 해주세요.”점원은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이내 구 만 이천 원 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명덕은 아까 뽑은 돈 뭉치를 통째로 점원에게 건넸다. 그의 손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살짝 떨렸다. 점원은 순식간에 열장의 지폐를 세고는 거스름돈을 명덕에게 내밀었다. 명덕은 돈을 받아들고 가게를 나왔다. 또 오세요-하는 점원의 인사말이 그의 귀를 때렸다. 두 번 왔다간 나 죽는다- 조그맣게 투덜거리던 명덕은 발걸음이 가벼워진 소녀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래, 이럴 때 쓰라고 지금까지 모았겠지. 더 싼 것도 많았을 텐데.. 명덕은 혼자 중얼거리다가 이내 머리를 저어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렇게 해봤자, 언젠가 후회하는 건 자신뿐이라고, 저번에도 그렇지 않았느냐고. 그 속에 있는 무언가가 그를 다독였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