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일은 왜 그렇게 빨리 포기하는 거지?

어쩌다가 세 번을 보게 되었다. 영화관에서 한 번, 케이블 채널에서 한 번, 집에서 비디오로. 이 영화 특유의 오밀조밀한 재미가 없었다면 졸음을 참느라 눈이 따금거리면서까지 영화에 눈 고정하고 보았을 리는 만무하다.

잘 만든 영화는 아무리 보아도 지겹지 않다. 아니, 보면 볼수록 더 깊은 재미를 느끼게 된다. 요즘 예전 봤던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잦아지면서 드는 생각이다. 처음 봤을 땐 의미없이 그저 스쳐 지나가던 대사나 화면들이 두 번 세 번째 볼 때는 느닷없는 재미와 웃음을 주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런 재미에 한번 본 영화 다시 보기는 취미질로 삼을 만하다.

각설하고. 이 영화는 배종옥이라는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두 남자(박해일, 문성근)가 벌이는 질투의 삼각 레이스가 아니다. 그런 구도는 단지 소재일 뿐, 이 영화의 주제는 우연히 배종옥을 알고 좋아하게 된 때묻지 않은 청년 박해일이 배종옥이 아니라 배종옥을 사로잡은 문성근에게 매혹된다는 이야기다. 어느 평론가의 논평을 인용하여 한마디로 줄이자면, "소년이 어떻게 남자가 되는가에 관한 인류학적 보고서"이다.

문성근은 노회한 속물이다. 중년의 나이에 가정을 두고도 인생에 남은 건 로맨스뿐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다. 박해일과 최근 헤어진 여자친구도 문성근 한테 빠져서 박해일을 찼다. 나중에 박해일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문성근은 어물쩍 넘어간다. 편집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박해일 같은 미래가 불안한 젊은 청년을 심부름꾼으로 부리면서 시혜를 베푸는양 한다. 박해일이 하숙집 딸이랑 엉겁결에 섹스를 하고 책임감에 괴로워 하자 결혼하지 말고 즐기기만 하라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다.

처음 박해일은 여자 킬러인 문성근이 배종옥을 낚아 채버리자 화가 났다. 여자 친구도 문성근 때문에 박해일을 차버렸다. 도대체 어떤 남자길래 여자들마다 맥을 못추나 싶은 마음에 그에게 접근한다. 그의 차를 운전해주고 출퇴근도 같이 하고 집의 컴퓨터도 고쳐주고 심부름도 한다. 심지어 문성근의 술상대를 해주느라 학위 논문까지 포기한다.

그러다가 차츰 문성근이 세상에 닳아질만큼 닳아진 처세의 대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게 올바른 삶인지 아닌지 판단하지 않은 채 그에게 경도된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는 박해일에게 안정된 가정과 직장과 명예, 그리고 여자들의 마음까지 다 가진 문성근이라는 존재는 명쾌하고도 선망할만한 사람이었던 것.

그는 문성근의 영향력 아래 들기를 자청한다. 여자와 연애하는 것보다 문성근에게서 배우는 남자 어른의 처세가 박해일의 허영심을 더 자극했기 때문이다. 문성근과 한 여자를 두고 경쟁한다는 것은 어차피 게임이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박해일. 게임이 안되는 게 아니라 힘들고 복잡하니까 스스로 포기하는 거라는 사실은 모르는 박해일.

그는 자신의 순수한 열정과 젊음이 문성근보다 더 큰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그것을 아는 사람은 배종옥이다.) 상황의 알리바이에 충실히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사는 가장 평범한 40대 남성의 가부장적인 질서의 체현자인 문성근에 매혹당한다. 문성근의 속물근성을 잘 알고 있는 배종옥은 박해일에게 그를 멀리하라고 충고하지만 소 귀에 경 읽기다.  

결국 질투 때문에 맺은 관계가 가부장적인 지배-복종의 관계가 된다. 유사 아버지-아들의 관계가 탄생하는 것이다. 남녀 관계에서 순수함을 우위에 두는 여성들에게 기득권을 중심으로 뭉치는 남자들 가부장적인 연대는 이해할 수 없는 불순함이다. 남자들은 알까.

문성근처럼 살면 사랑하는 여자를 뺏길 일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말빨 서지 않을 일도 없고 무책임한 짓을 저질러도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박해일은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기세 좋던 청년들이 군대에 갔다오면 지극히 현실적인 남자로 둔갑하는 변신술은 권력에 압도당한 젊은이들의 자기 포기 현상이지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마치 문성근을 만난 박해일이 순수한 열정의 자리에 현실적인 가치들을 덧씌우는 것처럼.

소년이 만약 여성의 방식으로 세상을 습득하고 남자가 된다면 세상은 조금 더 평화롭지 않을까. 만약 박해일이 문성근이 아니라 배종옥을 택했다면 혼란스럽긴 했겠지만 순수함을 간직한 남자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장의 빈손과 빽없음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미래를 속물에게 위탁해버린 박해일의 태도는 이해를 하면서도 씁쓸한 연민을 자아낸다.

젊기에 조금 더 세상을 견뎌보거나 세상과 맞장을 뜨거나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을 수도 있건만 그는 왜 그렇게 일찍 포기하는 거지? 박해일이 문성근 나이가 되면 저절로 평범해져 있을텐데, 왜 그리 빨리도 권력에 맛을 들이는 거지? 불확실함에 맞서는 용기 대신 능숙한 자기 합리화를 선택하는 박해일 캐릭터가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한국사회 남자들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현실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감독의 예리한 시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여성감독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중년이 되어서야 뭔가 인생을 잘못 살아왔음을 깨닫는 남자들은 젊은 시절 특별한 가치 판단없이 "문성근을 만난 박해일 현상"을 체화하고 남들보다 더 빨리 문성근이 되기 위해 안달하면서 살아 온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뒤늦게 자신의 순수한 열정으로 세상과 부딪혀보려 하지 않았던 사실을 깨달았을 때 차곡차곡 쌓아 온 남성들의 연대에서 발을 빼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깨닫게 될 것이다. 발을 빼기엔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순수한 사랑을 믿지 못하고 외도와 매매춘과 권력욕에 영혼을 스스럼 없이 팔아버리면서도 "미안" 한마디 하고 뒤돌아서 씻은 듯 잊어버리는 무감각한 인격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문성근처럼 살아가는 게 나쁜 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방식 중의 한가지일 뿐이니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문성근스러운 남자를 만나면 눈살이 찌뿌려진다. 감동이 없고 왠지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이 세상을 움직이는 현실적인 힘이라 해도 그 힘에 굴복당하거나 타협한 나약한 존재라는 인식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나만의 비관적인 희망사항일지는 모르겠지만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이유도 나와 같은 바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출처 : 블로그 > femmefatale3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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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 썼죠?

제가 쓴 글은 아니고 네이버 리뷰 베스트에 올려진 글을 퍼왔습니다.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을 보면서

아.. 이 찝찝한 기분은 뭘까.. 제 머릿 속을 저조차도 알 수 없어 한동안 고민스러웠는데 (물론 그러고서 금새 잊고 살죠.)

정말 잘 정리된 글이 있길래 가져왔어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훌륭한 재능을 보지 못하고, 남의 하찮은 재주를 부러워하곤 합니다.

[질투는 나의 힘]은 연애를 소재로 한, 한 남자의 성장 (혹은 타락) 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어떤 재물과 권력으로도 살 수 없는, 젊음이라는 자신의 눈부신 매력을 알지 못하고,

노회한 중년남성을 부러워하고 닮아가려 합니다.

영화에서 반드시 교훈을 찾고 인생의 지향점을 발견해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됩니다.

젊은이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습니다.

하지만 물에서 갓 꺼내놓은 물고기가 살기 위해 파닥거리는 것과 같은 싱싱한 매력,

기성사회의 높은 벽 앞에서, 그 벽에 맞서 최후의 순간까지 맞서고 피를 흘리는 생명력이야말로

젊음이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요.

아직 조금 더 뛸 수 있는 힘이 남아있는데도 하루 빨리 쉬고 싶어하는 그 나약한 마음을 질책해봅니다.

영화 외적으로

박찬옥 감독은 여성이고, 감독으로 첫 데뷔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영화는 대박을 터뜨리기 어려운 것도 현실입니다.

첫 영화로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음에도 메이저 영화 세계에 들어서지 못하고 현재까지 별다른 소식이 없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