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에서 그간 누적된 피로는 나를 덮쳤다. 원래는 이틀만 쉬고 다시 걸으려 했지만 의도치 않게 닷새를 쉬고는 실로 오랜만에 걸었다. 오르막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즐거운 것을 보면 나는 마치 피터 래빗이 깡총 뛰어나올 것 같은 갈리시아의 낙엽길이 그리웠나보다.

낙엽길을 한창 걷다 들어간 바에서 무심코 등산 스틱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나무의 것인지 모를 낙엽들이, 추억들이 날카로운 스틱 끝에 꽂혀있었다.

낙엽들을 보며 맥주 큰 잔 하나를 비웠다. 무슨 인연으로 나와 길을 함께 걷고 있을까. 오늘 닿을 목적지까지 함께 걸었으면 했다. 그러나 꽂힌 낙엽을 잃지 못하면 스틱을 짚을 수도 그 자리에 멈추어 밤을 지샐 수도 없다.

다시 낙엽길을 걸었다. 지나간 나무들의 추억은 어느 새 하나 둘씩 사라지고 새로운 나무들의 추억들이 꽂혔다 사라졌다 했다.

약 두 시간을 더 걸어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스틱 끝에는 바에서부터 나와 걸어오던 낙엽 하나와 처음 보는 낙엽 몇몇이 남았다.

삶을 걸을 때도 수많은 나무의 낙엽들이 스틱에 꽂혔다 사라졌다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낙엽들은 오늘 마지막 낙엽 하나와 같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겠지.

생각해본다. 내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나와 함께 남을 마지막 낙엽들은 어떤 나무의 것일까. 어떤 것일까.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6 00:0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