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을 맞은 교내 게시판이 요란하다. 평소 흰 전지에 손글씨로 쓴 투박한 대자보 몇 장만이 자리하던 정경대 후문 게시판엔 각종 동아리와 학회의 신입회원 모집 포스터가 어지러이 붙었다. 낭만과 보람 가득한 대학생활을 하겠다는 희망에 부푼 새내기 시절을 회상한다. 수업 이외에도 학과 행사 그리고 다양한 동아리 활동까지 수많은 선택지가 놓였다. 정형화된 틀 안에서 주어지는 과제를 수행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고교 시절엔 해본 적 없는 고민이었다. 결정권이 생기며 자유로워졌지만 가슴 한 구석에는 불안함이 자리했다. 과연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가. 내가 내리는 판단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어떤 일에 매진하는 것이 당연한 시간투자가 될 수는 없다. 모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있다.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매번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기에, 나는 고민했다.


비슷한 시기, 대형서점 문구 코너에서 노트 한 권을 충동 구매했다. 단순하고 깔끔한 디자인과 180도로 펼쳐지는 기능성에 반해 구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집에 와 포장을 뜯는 순간 후회했다. 인조 가죽 재질의 커버에 줄이 그어진 속지, 손바닥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밋밋한 노트는 그리 두껍지도 않았고 오로지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 가격이 물건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점이었다. 가방에서 노트를 볼 때마다 울컥했고 돈이 아까워서라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뜻하지 않게 노트는 새내기 시절을 함께했고, 일상은 차곡차곡 기록되었다. 아릿한 첫 사랑의 추억부터, 당시 깊이 생각하던 고민까지, 스무 살 나의 이야기가 노트 한권에 오롯이 담겼다. 기록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같은 디자인의 노트를 네 권 째 사용하는 지금, 나에게 있어 노트의 가치는 처음 비싸다고 생각한 가격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중요한 것은 판단을 내린 다음의 일이다.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이 옳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 옳은 선택이 되도록 ‘만든다.’ 싸고 좋은 물건이라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합리적인 소비가 아니며, 비싼 돈을 주고 산 물건이라도 닳고 다 떨어질 때까지 썼다면 아깝지 않다. 주어진 기회를 완전히 활용하자. 청춘의 시간이라는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소비가 바람직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서동재 사진부장  awe@kukey.com


* 수레바퀴는 고대신문 부장진이 쓰는 칼럼 코너입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5 08:1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