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칼럼] 마법같은 삶의 유머

아버지의 서재는 벽이 모두 책으로 도배되어 있었다는 말이 영락없을 정도로 책상 너머 창문과 방문만이 바깥세상과 이어지는 통로였다. 방으로 부족하여 밀려난 책들은 응접실을 몽땅 차지하고 있었으니, 이사 갈 때 제일 골칫거리가 책이라 “아빠, 우리 이사 고만가자”, 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내뱉어지곤 했다. 주둥이를 내밀고 투덜대면서도 손에 들어오지 않는 책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까치발로 책장에 올리며 낑낑대던 내 어린 시절 추억이 어찌 된 일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으로 진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난 책에 대한 로망이 있다. 외국에 나가면 일주일 정도는 책방 순례에 할애한다. 이틀은 대학 내 서점에, 또 이틀은 외진 곳 깊숙한 곳에 숨어 자기를 알아주는 자의 방문을 기다리는 고서점에, 그리고 3, 4일은 도심가에 눈부시게 자리 잡고 있는 최신식 서점이다. 대학 구내서점은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 알 정도로 책들을 눈에 넣고 살았고, 고서점은 무슨 보물을 찾아다니는 모험가 기분으로 돌아다닌다. 이곳들 어디를 가든 사다리 끝자락이든, 모퉁이 한 자락이든 차지하고 앉아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책 읽는 즐거움에 빠지기도 하고 예정에 없던 책들을 한 아름 안고 책방을 나서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이런 내 책방 순례에서 사전 정보 없이 쇠붙이가 나침판에 끌리듯 내 손에 들어 왔던 책이 아르헨티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 상담가인 호르헤 부카이의 이다. 짧은 시로써 또는 수필로써 쉽게 읽히면서도 삶에 대한 다양한 성찰 거리를 던져주는 제법 진지하면서도 유머가 흐르는 책이다. “나는 오늘 새벽에 태어났다. 오늘 아침 나의 유년기를 살았다. 정오에는 이미 나의 청년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그렇게 빨리 흘러간다는 사실이 놀라운 게 아니다. 아마도 내일이면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늙어버려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약간 불안해진다.” ‘생의 짧음’을 부제로 한 이 글에서 우리 역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다 마치지 못했는데, 내일 잘못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을 느끼며 사는 자신들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자기 속살을 이렇게 구체적으로만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아래 글은 ‘주정뱅이의 논리’를 약간 정리한 전문이다.

“한 사내가 술집에서 위스키 다섯 잔을 주문했다. 당연히 종업원은 물었다. ‘한꺼번에 다섯 잔이나요?’ 그 사람은 답했다. ‘그래요, 얼음 없이’. 종업원은 손님의 요구대로 갖다 주었고 그는 그것을 한 입에 쏟아 부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넉 잔을 달라했다. 물론 이번에도 얼음 없이. 이 네 잔도 단번에 마셔버렸다.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했지만 그는 다시 종업원에게, 실실 웃음을 흘리며 이번에는 석 잔을 요구했다.  물론 이번에도 얼음 없는 이 세 잔을 한 순간에 입안에 털어 넣자, 그의 웃음은 멍청해지고 그의 시선은 초점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번에는 두 잔! 그는 종업원을 자기 동생이라며 건배까지 하자고 소리치더니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면서 마지막으로 딱 한 잔, 이라고 한다. ‘딱 한잔만... 에?’ 그 한잔을 꿀꺽 삼켜버리자 머리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던지 그만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바닥에 입이 뭉개진 채로 종업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의사가 도통 내 말을 안 믿는다니깐. 하지만 자네가 증인이야. 적게 마시면 마실수록 더 나빠진다고!’” 인간은 누구나 자기 합리화를 위해 변명거리를 찾는 존재인가 보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진주알 마냥 27개가 꿰어있다. 꿈이 지속되는 동안 마법은 있다. 인간이 문명이라는 감옥을 만들고 그 감옥이 없으면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이란 우리가 바르게 살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거다, 등등. 어떻게 살아야 진정한 삶인지에 대해, 바람직한 인간관계에 대해, 진정한 사랑에 대해, 이기심과 지식에 대해, 진리와 시기심과 슬픔과 분노 등에 대한 생각거리들을 비유와 유머로 버무려 설득력 있게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고 현실을 발견하게 하는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로 번역 소개되어 있으니 생각하는 기회를 갖기 바란다.

안영옥

문과대학교수 서어서문학과

고대신문  news@kukey.com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2 22:5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