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막장 드라마 같았던 정당의 공천이 후보등록 마감과 함께 드디어 막을 내렸다. 대본 없는 드라마였기에 더욱 흥미진진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부끄러운 정치 수준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들이었기에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당의 후보 공천과정은 정당의 이념과 정체성, 그리고 비전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자신들의 이익 챙기기에 급급해 국민과 언론의 비판은 안중에도 없었다. 평소 국민 눈높이 개혁을 그토록 외쳤지만 선거가 임박하니 태도가 돌변했다. 정당은 공천과정에서 유권자의 뜻을 헤아려 새로운 인물과 정책을 내세워 투표로 평가받는다. 정당은 수권정당이 되기 위해 득표 경쟁을 해야 되는데 작금의 상황은 소속정당 자체의 생존보다는 계파의 생존에 더 매달리는 낯선 모습이다.

집권 여당으로서의 품위와 위상을 송두리째 날려 버린 새누리당은 ‘유승민 파동’으로 ‘친박’의 패권주의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집권 여당이기를 포기한 채, 어쩌면 총선 승리보다는 계파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었다. 일부 선거구에서는 후보등록 마감일에 쫓겨 공천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집권 여당의 대표가 공천에 반발해 ‘옥쇄 투쟁’을 벌이는 사상 초유의 코미디를 선보여 철옹성과 같았던 대구의 민심이 흔들리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비례대표 후보 공천과정에서 잠잠했던 계파 갈등이 다시금 부상했다. 실질적인 당의 수장인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자신을 비례대표 2번에 공천하는 ‘셀프 공천’이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국민의당은 현역의원 20인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해야 국고보조금을 받을 수 있기에 다른 당에서 공천에 불만을 갖고 탈당한 인물들을 대거 영입했다. 안철수 상임공동대표 자신이 탈당한 명분인 ‘새정치’의 정체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선거가 끝난 후 국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신당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 묻고 싶다.

선거가 임박해 후보를 결정하다보니 유권자들은 자기 지역구에 도대체 누가 출마하는지, 그들의 공약은 무엇인지, 커다란 혼란과 암흑 속에 빠져있다. 설상가상으로 야권 후보들은 표가 분산될 것을 우려해 아직도 야권연대, 즉 후보단일화를 모색 중이다. 정치권의 계파 싸움과 이합집산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당연히 유권자이다. 선거일정이 자꾸 늦춰지다보니 유권자들은 공약과 정책은커녕 후보자 이름도 잘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역대 최악의 공천 파동과 급조한 부실 공약, 이런 깜깜이 선거의 출발점은 선거구획정위원회의 파행이었다.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선거구획정위의 소속을 국회에서 중앙선관위 산하로 옮겼지만 여야 정당을 대변하는 위원들이 4대4로 갈라져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아 위원장은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정치권은 2월말에야 합의에 이르렀고 획정위의 자율성과 독립성 보장은 공수표에 불과했다. 선거구획정위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정치권이 단순한 간섭이 아닌 최종 결정의 주체였던 것이다. 지난 19대 총선의 공천이 역대 최악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당시에는 그래도 2월말에는 지역구 공천이, 3월초에는 비례대표 공천이 마감돼 후보자와 유권자가 소통할 시간이 한 달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3주도 주어지지 않았다. ‘총선연기론’이 여론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 당연하다.

각 정당들이 이제야 유권자에게 공약을 제시했다. 언론매체와 시민단체들이 앞 다퉈 공약을 비교하고 검증하고 있다. 그러나 주요 정당들의 공약을 살펴보면 옛날 공약의 재탕·삼탕 수준이 대부분이고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는 비전이나 실천계획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행히도 지역구 단위에서 지역 현안에 대한 공약은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공약들이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지, 실현 가능한지, 국민의 삶을 높이는 비전을 제시하는지에 대해 검증하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공천 파행, 선거 파행을 정치권의 탓으로만 돌려 선거를 방치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유권자가 나서야 한다. 후보자의 인물과 능력, 제시한 공약의 우수성을 꼼꼼히 따져 선거 파행만은 막아야 하는 것이 유권자의 책무이다.



윤종빈(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래정치연구소장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9 03:1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