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쉬르학(學)의 대가 미셸 아리베(Michel Arrive, 파리 10대학) 명예교수의 강연이 본교 응용문화연구소(소장=김성도)의 주최로 1일과 5일 양일에 걸쳐 열렸다. 현대자동차경영관 B206호에서 열린 이번 강연에는 30여 명의 청중이 참여했으며 1일에는 1부, 5일에는 2,3부 강연이 진행됐다. 아리베 교수는 이번 강연에서 소쉬르의 필사본에 근거한 새로운 소쉬르학(學)을 제시했다.

소쉬르, 기호학을 창시하다
  일반적으로 소쉬르는 언어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러나 아리베 교수는 언어학은 이미 19세기부터 존재했으며 소쉬르는 기호학(Semiology)의 창시자에 가깝다고 말한다. 기호에 관한 소쉬르의 관심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오래됐다. 아리베 교수는 기호학의 탄생을 연대기적으로 제시했다. “기호학은 보통 1916년 의 출판과 함께 등장했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소쉬르에 의해 논의됐습니다” 아리베 전 교수에 따르면, 소쉬르가 기호학을 최초로 언급한 것은 1894년이다. 그러나 당시 기호학은 하나의 학문체계라기 보다 언어학 강의의 일부로 여겨졌다. 소쉬르의 대학동기인 나빌이 1901년 기호학을 학문의 한 분야로 분류한 이후 소쉬르는 1908년 제네바 대학에서 열린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공식적으로’ 기호학을 언급했다.
  아리베 교수에 의하면 소쉬르는 사회적 삶속에서 기호를 연구하고 기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했다. 이때 기호로 분류되는 대상은 얼굴표정, 수화, 입는 옷 등 여러 가지다. 소쉬르는 주로 음성언어 기호체계를 중시했다. 이는 소쉬르가 음성언어만의 특성인 언어의 자의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는 그 자체의 형식인 기표(Signifiant)와 형식을 배제한 내재적 의미 기의(Signifie)로 구성된다. 기표와 기의 사이의 원리는 자의적이다. 이를테면 ‘아버지’라는 단어를 기표로 볼 때 아버지라는 뜻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란 의미를 자의적으로 ‘아버지’에 부여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언어기호로 작동하는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기호의 자의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호학을 언어의 관점에서 연구했다.

문학 언어의 기호학적 분석
  5일 진행된 2부 강연에서 아리베 교수는 소쉬르가 문학을 어떻게 분석했는지를 설명했다. 언어학자였던 소쉬르는 문학보다 문학 언어에 관심을 가졌다. 스토리에만 국한되는 문학 연구와 달리 문학 언어는 문자, 문학과의 관계 등 여러 갈래로 연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특히 ‘아나그램(Anagram)’과 ‘게르만 신화’에 관심을 보였다.
    아나그램은 ‘문자 속의 문자’라 불리는 언어기호의 일종이다. 인도유럽어족 전문가인 소쉬르는 아나그램을 연구하기 위해 고대 라틴어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라틴어 시(詩) 수천종류를 분석했다. 그는 연구과정에서 수많은 아나그램을 발견했다. 아리베 전 교수는 예시를 통해 라틴어 시 속의 아나그램을 설명했다.

1) DONOM AMPLOM VICTOR AD MEA TEMPLA PORTATO
2)          A PLO            A            PL   O     O

  1)의 내용은 원문 시의 일부이고 2)의 내용은 구절 속에 아나그램으로 숨겨진 ‘Apolo’라는 ‘심층 텍스트’다. 이 시는 전쟁에 승리한 용사에게 태양의 신 아폴론이 공물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시 구절 속에는 ‘Apolo’라는 아폴론의 이름이 아나그램으로 숨겨져 있다. 소쉬르는 이런 아나그램이 우연의 일치인지 또는 문학적 장치를 위한 고의적 의도인지 연구했으나 답을 찾을 수 없었고, 이는 아직 소쉬르학(學)의 과제로 남아있다.
  게르만 신화 분석은 소쉬르 문학 언어 분석의 두 번째 연구였다. 소쉬르는 오랜 시간동안 구술로 전해 내려오다 문자 언어로 정착되는 신화의 기호학적 특성에 흥미를 느끼고 게르만 신화 분석을 시작했다. 소쉬르의 분석에 따르면 문자 언어로 정착된 신화는 더 이상 ‘시간의 역경’을 겪지 못한다. 구술로 전해지는 신화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변형이 일어나기도 하고 사회변화의 흐름에 따른 적응이 이뤄지기도 한다. 그러나 신화가 누군가에 의해 작위적으로 문자의 틀 안에 ‘고정’되면 더 이상의 변형은 일어나지 않는다. 즉, 게르만 신화에는 지속적으로 변하는 구술의 형태와 고정된 문자의 형태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의 사회적 소통과 변형을 강조한 소쉬르는 신화 분석을 통해 전자만이 기호학의 연구 대상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소쉬르 학문에서의 내재주의
  3부 강연에서는 소쉬르 언어학의 내재주의 논쟁을 다뤘다. 소쉬르를 내재주의 언어학자로 바라본 루이 옐름슬레우(Louis Hjelmslev)의 관점이 최근 소쉬르 필사본에서 드러난 소쉬르의 초월주의적 내용과 상충되며 일어났다.
옐름슬레우는 ‘언어는 순수한 가치체계’라고 주장한 소쉬르를 ‘몇 안 되는 내재주의 언어학자’라 일컬었다. 내재주의란 개념 적용을 할 때 다른 어떤 경우나 사례와 별개인 그 자체의 독립적 위상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을 뜻한다. 언어학적 내재주의는 언어 그 자체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청자, 화자 등)을 제거한 채 언어를 연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아리베 교수는 소쉬르를 내재주의 언어학자로 보는 게 성급한 판단이라 주장하며 소쉬르 필사본을 모아 최근 발행된 소쉬르 유고집을 근거로 들었다. 유고집에서의 소쉬르의 언어학은 말년에 내재주의를 탈피한 것으로 나타나 기존 내재주의에만 국한된 관점에서 벗어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옐름슬레우의 주장 자체에도 한계가 있다. 옐름슬레우는 언어 연구가 언어 외부에 위치한 음성학적, 생리적, 물리적 차원의 모든 것을 제외한 채 진행돼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옐름슬레우는 자신의 주장 속에 언어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모순을 저질렀다. 언어란 그것을 사용하는 주체, 즉 인간에 의해서 발전하는데, 옐름슬레우는 내재주의를 강력히 주장한 나머지 언어 주체의 발전 가능성을 한정시킨 것이다. 그는 인간에 의한 언어 발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언어는 언어 주체라는 외부 요소 없이 그 자체로 발전한다”며 주체에 의한 언어 발전에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그렇다면 소쉬르는 언어 자체에 집중한 내재주의자인가 언어 내적인 것을 초월해 언어 주체, 언어의 음성·생리학적 특징을 중시한 초월주의자인가. 아리베 교수는 답을 내리지 않았다. “이는 우리 모두가 앞으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정서영 기자 jsy@kukey.com
기사원문 1736호(11월 11일자) 7면
http://www.kukey.com/news/articleView.html?idxno=19937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4 04:3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