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강연은 각각 다른 장소에서 3개의 주제 발표가 동시에 진행됐다. 이 중 서관 B103호에선 ‘소쉬르와 구조주의의 현대적 적용’을 주제로 이도흠(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조국현(한국외대 독일어과), 백승국(인하대 문화콘텐츠학부), 황영삼(인천대 도시설계학과) 교수의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자성(自性)은 없다”
  이도흠 교수는 ‘소쉬르 기호학에 반영된 불교적 색채’를 주제로 발표했다. 인도유럽어족의 세계적 권위자인 소쉬르는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며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는 그의 기호학에도 반영돼 나타났다.
  특히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은 소쉬르 기호학의 특징인 ‘구조적 사유’에서 두드러진다. 서양적 탐구가 대상의 실체에 주목한다면 동양적 탐구는 대상의 관계에 주목한다. 똑같은 사람에 대해 물어도 서양인은 “너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반면 동양인은 “너의 가족, 친구, 선생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니 저것이 일어난다(잡아함경 中)’로 요약되는 연기론은 관계적 사유의 꽃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깊은 관련을 맺고 서로가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된다. 연기론에 따르면 모든 것은 의지성(依支性)을 지닐 뿐 그 자체의 자성(自性)은 지니지 않는다. 서로간의 관계와 차이만 부각될 뿐이다.
   이도흠 교수는 소쉬르가 연기론의 영향을 받아 관계와 차이의 언어관을 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의 구절을 인용한다. ‘언어에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중략) 그러나 언어에는 실재적 관계가 없어 차이만이 존재한다. (중략) 하나의 기호가 함유하고 있는 개념이나 음성적 자질보다는 그 기호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기호가 더 중요하다’ 얼핏 간단해 보이는 문장이지만, 이도흠 교수는 이 문장이 소쉬르가 서양의 실체적 사고를 극복하게 된 획기적 발상전환의 시작으로 보았다.
  소쉬르 기호학의 불교적 특징은 ‘나무’라는 간단한 단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실재론에 따르면, ‘나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나무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소쉬르의 기호학에선 ‘나무’는 단지 기표일 뿐 아무런 의미도, 본질도 갖지 못한다. ‘나무’를 나무답게 만드는 것은 다른 단어다. ‘풀’이라는 단어와의 차이를 통해 ‘나무’는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란 의미를 가진다. 풀이 없었다면 나무는 의미가 없고 풀 역시 나무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기호의 의미는 기호 자체에 내재된 것이 아닌 다른 기호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드러난다. 이처럼 언어 구조 전체에서 단어 간의 관계를 통해 단어는 의미를 드러낸다고 보는 것이 소쉬르 언어학의 구조주의적 특성이다.
  그러나 소쉬르의 구조주의와 연기론이 완전히 같진 않다. 소쉬르가 기호들 간 차이를 통해 기호의 의미를 드러내려 했다면 연기론은 사물들 간 차이를 통해 존재의 공(空)에 대해 논한다. 즉, 기호학이 언어, 기호 등의 차이와 구조를 통해 질서를 분석하는 ‘과학’이라면, 연기론은 관계를 통해 공을 드러내는 ‘철학’이다.

소쉬르와 기호 마케팅
  백승국 교수는 ‘소쉬르 기호학과 마케팅의 관계’를 주제로 발표했다. 마케팅과 기호학의 결합은 1980년대부터 기호학자들이 기호학 분석 자료로써 광고를 분석하며 시작됐다.
  미국 마케팅 협회는 마케팅을 소비자의 니즈에 맞게 더 많은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기업의 몸부림이라 본다. 기존의 마케팅 이론은 물건의 사용으로 인한 만족이 아닌 소유로 인한 소비자의 신분 상승 욕구를 만족시킬 때 더욱 효율적으로 제품을 판매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기업은 제품의 효용보다 브랜드 가치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과정에서 마케팅에 기호학을 접목하기 시작했다.
  통상적으로 마케팅 분야에서 기호학은 디자인, 광고, 네이밍 등 마케팅 후반에 관여하는 정도로 인식됐다. 하지만 백 교수는 마케팅 초반에 기호학이 적용되면 더 많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전체 맥락과 컨셉에 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케팅 분야에서 기호학의 실제 적용 시기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1980년대 미국 분석기호학의 시기로 판짜니(Panzani), 블론스키(Blonsky) 등이 주로 광고 분석을 통해 마케팅의 기호학적 분석에 중점을 뒀다. 그러나 분석기호학은 마케팅을 문화적 맥락 속 하나의 기호로써 학문적으로 분석하기만 할 뿐 마케팅의 문제점과 발전을 위한 실용적 고찰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두 번째 시기는 분석기호학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기호학이 마케팅에 좀 더 실전적인 조언을 하는 실용기호학의 시기다. 그러나 이 시기 역시 기호학의 난해성과 마케팅에 대한 기호학자의 몰이해 등으로 경영학에 맞춰진 기호학이 활용되지 못했다. 이에 현재 마케팅 기호학은 경영학의 영역을 크게 침해하지 않으면서 기호학만의 특수성을 마케팅에 적용하는 ‘작은 공헌’을 하는 방향인 세 번째 시기를 맞고 있다.
  소쉬르의 기호학 이론은 마케팅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백 교수는 소쉬르의 랑그 개념을 차용했다. 소비자들은 제품의 효용보다 브랜드에 관심이 많다. 소비자들에게 상품은 하나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때문에 마케팅 전문가들은 브랜드 상징성 구축을 통한 마케팅 전략을 펼친다. 스타벅스가 다른 커피 브랜드에 비해 엄청나게 고급스럽진 않더라도 고급 커피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듯이, 마케팅 성공 여부는 소비자 머릿속에 상품에 대한 하나의 ‘사회적 브랜드 이미지’를 심느냐에 달려있다. 이는 소쉬르가 제기한 랑그 체계와 유사하다. 소쉬르의 기호학이 마케팅에 적용되는 단편적인 예시다.
  백 교수는 위 사례 같은 직접적인 영향 이외에도 기호학을 발견했다는 것 자체로 소쉬르가 마케팅에 커다란 영향을 줬음을 강조했다. 코카콜라 등 전 세계 공통 브랜드에 대한 고찰, 매장의 제품 배치, 판매원의 복장과 행동양식 등 기호학은 이제 마케팅과는 뗄 수 없는 관계로 발달했다. 소쉬르가 창조한 전통 기호학은 100년의 시간을 거쳐 오늘날 마케팅에 사용되는 응용기호학으로 발달한 것이다.

정서영 기자 jsy@kukey.com
기사원문 1736호(11월 11일자) 6면
http://www.kukey.com/news/articleView.html?idxno=19938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3 04:1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