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섭하지 않아야 좋은 드라마 나옵니다"

이정명 작가 인터뷰

탄탄한 스토리를 가진 소설을 이용해 만든 TV드라마는 원작의 인기와 더불어 유명세를 타는 경우가 많다. <바람의 화원>과 <뿌리깊은 나무> 역시 그렇다. 한글 창제를 이뤄낸 세종, 조선 미술의 르네상스를 가져온 김홍도와 신윤복. 한글과 풍속화에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한 권의 책과 그 책을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였다. 독자는 영상을 보는 시청자가 됐고 원작에 대한 궁금증으로 시청자는 독자가 되기도 했다. 책 <바람의 화원>, <뿌리깊은 나무> 이정명 작가를 만나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와 그의 작품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 원작 작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원작 작가는 어떤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소설과 드라마는 매체와 수용자가 달라요. 어떻게 해야 시청자에게 잘 다가갈 지는 PD나 작가 등 전문가들이 정확하게 알고 있죠. 제가 하는 일의 90%는 어떤 제작진, 제작사가 더 효과적으로 만들까에 대한 선택이죠. 배우 캐스팅에 관해서도 일절 간섭하지 않아요. 저는 배우의 겉모습만을 압니다. 드라마를 연출하는 제작진만이 배우의 잠재력을 알고 그에 맞는 배역을 줄 수 있어요”

-배우가 인물 연구를 위해 도움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나

“작가는 인물에 대한 모든 것을 책에 풀어 놓아요. 책에 있는 내용 이외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족에 불과하죠. 배우들 스스로 책에 담겨진 인물에 대해 연구를 해야 그 인물의 매력을 잘 나타낼 수 있다고 봐요”

-소설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내용과 흐름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드라마는 장르 특성 상 재밌는 요소를 넣고 갈등 구조를 심화 시키는 등 드라마적인 장치가 있을 수밖에 없죠. 소설과 방식은 달랐어도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의식은 같았기에 만족합니다”

-드라마가 갖지 못하는 소설만의 장점이라면

“책이 드라마에 비해 다소 딱딱하고 어렵거나 지루할 수 있어요. 하지만 활자는 독자에게 생각의 여유를 줘요. 독자는 능동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죠”

-가장 기억에 남는 드라마 장면이 있다면

“하나씩 꼽으라면 <바람의 화원>에선 신윤복과 정향이 서로의 기예를 겨루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신윤복은 그림으로, 정향은 가야금으로 각자의 기예를 뽐냈었지요. <뿌리깊은 나무>에선 광평대군이 죽고 세종이 슬퍼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네요. 세종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통곡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슬픈 느낌을 주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읽는 것보다 보는 것에 익숙한 것 같다

“활자를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다고 봐요. 이들이 나중에 세상을 이끌어 나가리라 생각하고요. 창의적인 영상물을 만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활자를 좋아하죠. 어떤 유명한 영화감독이 활자중독자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활자가 죽었다고 하지만 영상 시대의 기초는 활자에요. 영상이 너무 발전한 것이지 활자가 죽은 것은 아니지요”

작가 이정명은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한 ‘역사팩션소설’을 주로 썼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재미를 더해 독자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극한다. <바람의 화원>, <뿌리깊은 나무>, <별을 스치는 바람> 모두 비슷한 장르로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 출판된 <별을 스치는 바람>은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 갇힌 윤동주와 그의 시세계(時世界)에 빠져드는 일본인 간수 스기야마 도잔을 중심으로 윤동주의 순수한 열정과 영혼을 그린 작품이다.

▲ 사진제공 | 출판사 은행나무

-역사팩션소설을 주로 쓰는 이유가 있나

“기록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작가로 전향하기 전 15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면서 기록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느꼈어요. 첫번째 단계는 기자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는 취재원이에요. 두번째는 내용을 취사선택하는 기자나 데스크의 스크린을 거치는 것이죠. 마지막 단계는 같은 기록물을 읽고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독자입니다.

역사적 사건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당시 사건의 당사자들을 거치고 사건을 취사선택해 기록하는 사관의 시점에서 걸러져요. 수백년 후 그 기록을 읽는 우리는 각자의 해석으로 또 다르게 받아들이죠. 저는 ‘해석’으로의 역사에 관심이 있어요. 역사적인 기록은 극히 일부이기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관심을 갖고 보는 편이에요. 우리가 별로 관심이 없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당시 시대상황과 제 상상력을 결부시키면 새로운 이야기가 나와요”

-자료 수집은 어떻게 하나

“<뿌리깊은 나무>를 예로 들면 ‘한글 창제’에 관한 이야기를 써야지하고 단계적으로 준비하진 않아요. 개인적인 관심에서 시작해 수년 간 연구하고 조사합니다. 대학교 때부터 한글창제라는 사건에 관심이 있어 기자생활을 하면서 관련 책이나 논문을 많이 읽었어요. 한글창제부터 시작해 그와 연관된 세종, 조선초기 문물, 당시 사회상 그리고 언어학과 도구․기계의 원리까지 관심을 펼쳐 나갔어요”

-신간 <별을 스치는 바람>은 어떻게 시작됐나

“대학교 4학년 때 무작정 일본으로 배낭여행을 떠난 적이 있어요. 우연히 일본인 친구를 사귀게 돼 그 친구의 대학교에 놀러 갔을 때 일이에요. 교토 도지샤(東志社)대학이었는데 교정을 구경하다 시인 윤동주의 기념 표석과 도서관에서 윤동주의 한글판 시집을 발견했어요. 서울로 돌아와 윤동주 시인에 대한 기록을 찾기 시작하면서 관심이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죠”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다루는 소설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책은 한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이에요. <바람의 화원>으로 신윤복에 대해 제대로 알고 조선시대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된다면 감사한 일이죠. <뿌리깊은 나무>로 한글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고 <별을 스치는 바람>으로 윤동주 시인의 시를 아름답다고 여기면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20대 대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대학생 시절 강원도 여행을 하면서 밤에 완행열차를 탄 적이 있어요. 탔던 기차가 스위치백 선로를 지나갔어요.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면서 지그재그로 계속 움직였어요. 계속 그 자리에 머무는 것 같았지만 여명이 밝으면서 어느 순간 산을 넘어가고 있더라구요. 대학생들 역시 앞으로 나아갈 때도 있지만 다시 뒷걸음질 치는 순간이 있을 거고 그 자리에 계속 정지하고 있는 기분을 느낄 때도 많을 거에요. 하지만 나중에 보면 그 자리에 맴도는 것이 아니라 위로 올라와 있는 것이지요. 앞에 장벽이 가로막고 있을 때 그것은 필요한 정지, 후퇴라고 생각해보세요”

오은정 기자 jung@kukey.com

기사본문 고대신문 1703호(9월 3일 자)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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