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책을 빌려드립니다’ 한 주 동안 독특한 문구의 포스터가 학생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바로 종이책 대신 사람책을 빌려주는 도서관, ‘Human Library’행사다. 행사를 기획한 문화이벤트 기획동아리 KUSPA 이한준 회장은 “학생들에게 스펙 같은 물질적인 가치보다 인본적인 가치를 자각케 하고 고정관념을 타파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며 기획 취지를 밝혔다. 환경미화원, 성소수자, 동물사랑실천가, 스님 등 일상에서 만나보기 힘든 사람 책들은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서로 다름이 화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대신문이 △흑인 △채식주의자 △여성 ROTC △남성 페미니스트 등 사람 책 네 권과의 대화를 통해 편견과 마주했다.

나 사실 페미니스트야

-김대현(문과대 사회08) 씨

저는 ‘여성의 눈’을 가진 남성 페미니스트입니다.

제가 처음 ‘여성의 눈’을 뜨게 된 곳은 새내기 새로 배움터였어요. 대학교 입학 전까지 여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제겐 당시 반성폭력자치규약 관련 프로그램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사회의 구조가 불평등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또 ‘그것을 해결하자’고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죠. 그 때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던 주위사람들과 얘기도 해보고 관련 책도 읽으면서 점차 ‘페미니스트화’ 됐다고 볼 수 있겠네요.

많은 사람들은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페미니스트일거라는 생각을 못해선지 제 앞에서 페미니스트를 욕하는 모습도 종종 봐요. 인터넷에선 남성 페미니스트에 대해 저질스런 욕을 하기도 합니다. ‘여성에게 아부 한다’고요. 제 생각엔 그런 사람들은 ‘페미니스트가 여성 우월사회를 만들려고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사람들 입장에선 제가 멍청하게 남성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기는 걸로 보이겠죠.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한동안은 벽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남성 페미니스트로서 한계에 부딪쳤다고 할까요. 기본적인 개념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로는 공감이 안됐던 거죠. 페미니즘에 대해 말할 때조차도 남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자주 들었어요.

남자가 ‘여성의 눈’을 가진다는 게 힘들더군요. 생각보다 페미니즘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간극이 커서 주위 친구들은 페미니즘에 거의 적개심을 갖고 있었어요. 고립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페미니즘에서 옳지 않다고 말하는 행동을 제 친구들이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거든요. 고백컨대, 차마 고치라고 말을 꺼내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친구만 떠나보낼 것 같았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겁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저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건 좀 이상해보이잖아요. 그래서 ‘남성 페미니스트로서의 나’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꾸만 들었어요. 그래서 페미니스트 사회의 시민권이 있다면 그걸 갖고 싶다는 생각도 했죠. 일종의 자격지심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어요. 확신이 들더라고요. 페미니즘에서 ‘여성의 눈’을 뜨자고 말하는 것은 절대 여성 우월사회를 건설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남성의 눈’을 가진 사회의 추를 가운데로 옮겨 놓는 것이 페미니즘의 목적입니다. 그 때문에 ‘여성의 눈’을 갖는 게 필요한 거고요.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기 위한 거예요.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됐으면 해요. 이젠 제가 먼저 손을 내밀 겁니다.

건빵 먹는 여자

-여성 ROTC 김문경(공과대 화공생명09) 씨

‘여자면 여자답게 살아라?’ 저는 여성 학군사관(ROTC) 후보생 1기입니다. 남자만의 공간으로 여겨지는 군대에 도전했습니다.

여성 학군사관 후보생에 지원한 결정적인 계기는 없었어요. 막연히 학군단 후보생이 멋있다는 생각만을 갖고 있었죠. 사실 후보생이 된 데에는 운이 많이 따랐습니다. 학군사관 후보생은 3학년부터 시작이여서 그때는 제가 4학년이 돼 자연스레 지원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얼마 뒤 본교가 여성 학군사관 설치 시험대학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너무 깊게 고민하지 말자는 생각과 함께 부딪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엔 ‘군 생활은 남자의 것인데 왜 침범하려 하느냐’는 시선을 느꼈어요. ‘여자들이 스펙 쌓기 위해 지원하지 막상 군에 가면 짐만 될 것’이라는 얘기도 들었죠. 또 군 생활을 한 남학생들은 ‘왜 사서 고생하느냐’는 말을 전하기도 했고요. 특히 인터넷에서 여성 학군사관에 대한 부정적 댓글을 보며 ‘왜 이 선택을 했을까’란 후회도 들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역할이 정해져있다는 사회의 시선과 계속하여 마주쳤습니다. 부모님은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이나 하라고 하셨어요. 특히 어머님은 여자가 무슨 군인이냐며 말리셨죠. 제 남동생도 지금 군복무 중이어서 부모님의 걱정이 많으셨거든요.

하지만 이 편견에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난 여자니깐 남자와 다르다’는 무의식과 ‘여자라서 안 된다’는 패배의식에 맞서고 싶었어요. 일단 도전부터 해보자, 그리고 편견을 깨기 위해 실천해보자고 다짐 했지요. 과대표와 학생회 활동을 하며 얻은 리더십이 스스로 집단을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것 같아요. 그리고 회사에 오래 계신 삼촌이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셨어요. 사회생활을 하시면서 군 생활을 하며 얻는 리더십을 중요한 가치로 느끼셨다더군요.

저는 여성 학군사관 후보생의 첫 걸음에 있습니다. ‘여자면 여자답게 살라’는 말이 저를 지금의 도전에 놓이게 했습니다. 후보생활을 1년 동안 하면서 제가 후보생으로 가야할 길도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고 있어요. 11월 말에 병과를 받는데 저의 전공과 관련된 화학병과를 희망하고 있어요. 군 생활이 저의 삶의 연장선이 되어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길 바라요. 이 도전을 위해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한 것부터 몸소 실천하려 합니다. 아무 말 없이 꿋꿋이 저의 몫을 채워나가려고요. 몇 십 년 뒤 떳떳하게 마주했다고 여길 도전의 첫 걸음을 위해 차근히 나아가려 합니다.

채식은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채식요리연구가 겸 동물사랑실천가 한서영 씨

채식주의자도 각자의 취향에 따라 밥상이 다르단 걸 알고 있나요? 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비건(Vegan)입니다. 동물로부터 얻어지는 모든 것을 먹지 않고, 가죽 제품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엄격한 ‘모태 채식주의자’는 아니었어요. 고등학생 때 다이어트로 시작한 채식이 자연스레 생활의 일부가 된 거죠. 또 우연한 기회에 유기 동물들을 입양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됐습니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때엔 남들과 ‘조금’ 다른 제 식습관이 문제가 되기도 했어요. 회사생활 하면서 회식 자리가 잦았는데 그때마다 야채 쌈만 잔뜩 먹었거든요. 학창시절부터 몸에 익은 식습관이라 제겐 당연했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나 봐요. 어떤 분은 ‘건강이 안 좋은가요?’ 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먹는 것이 다르다보니 인간관계의 폭도 좁아졌어요. 회사 사람과 사무적 관계 이외에는 친분을 쌓을 기회가 없어지고, 친구도 하나 둘 떠나갔어요.

그때부터 채식을 하는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 카페를 통해 제 식생활을 공감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됐지요. 이들과 함께하며 직접 만든 채식요리를 선보이는 블로그를 만들고, 채식의 유용성과 방법을 소개하고 있답니다. 채식을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다가 새로운 매력을 찾게 된 거지요. 버섯을 구우면 고기처럼 쫄깃한 맛을 낸다는 것도 알게 됐고, 두부를 더욱 다채롭게 요리할 수 있게 됐어요. 또 육식을 하면 폭식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채식은 조금씩 자주 먹게 돼 포만감과 건강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답니다.

채식을 통해 얻은 또 다른 수확은 바로 내 강아지 ‘도로시’와의 만남이에요. 고백하자면 전 동물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물릴까봐 쓰다듬는 것도 두려워할 정도였으니까요. 우연한 기회에 동물사랑실천협회를 방문했고 구호동물입양센터를 통해 도로시를 만나게 됐습니다. 도로시와 함께하며 유기동물도 사랑받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이렇게 바뀐 동물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2년 전부터 동물의 권리까지 생각하는 채식주의자인 비건이 됐답니다.

저는 채식을 통해 ‘인생이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채식 요리에 관심을 가져 책도 냈어요. 또 제 강아지 도로시와 소중한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 없진 않았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얻고 경험했다고 생각합니다. 참, 이 행사에서 만난 독자 한 분은 제게 채식방법을 묻더군요. 채식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고,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어 매우 뿌듯하답니다.

나는 사발식까지 한 고대생이랍니다

-스탠리 하우어(정통대 컴퓨터통신09) 씨

걱정 마세요. 저 한국말 완전 잘하니까.

학교에서 저 같이 까만 피부의 외국인 학생을 보면, 사람들은 으레 먼 곳에서 잠시 교환학생으로 왔거니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에 온 지도 언 4년이 넘은 어엿한 고려대 학생이랍니다. 케냐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1년간 봉사활동을 하다가 바로 고려대에 입학했어요. IT에 관심이 많아서 정통대에서 컴퓨터통신공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그 먼 케냐에서 어떻게 올 생각을 했냐고요? 사실 저도 처음엔 미국에 가려 했죠. 주위에서도 한국에 간다고 하니까, ‘왜 문화도 다르고 생소한 나라에 가냐’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렇지만 아시아 문화를 겪어 볼 기회는 쉽게 오지 않기 때문에 결심을 굳혔습니다. 또 한국은 IT분야가 많이 발전된 나라라서 제 관심분야와도 맞아떨어졌죠.

처음 한국에 왔을 땐 난생 처음 겪는 문화에 당황한 적이 많았습니다. 한국 사람이 저를 신기해하듯이 저도 한국 사람들이 굉장히 신기했어요. 특히 ‘오빠’라는 단어가 굉장히 불가사의했어요. 친오빠도 아닌 남자친구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것에 참 놀랐죠. 고려대의 전통인 ‘사발식’도 빠뜨릴 수 없어요. 한국에서도 오직 고려대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아주 강렬한 경험이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컬쳐 쇼크’도 들려드릴게요.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을 때였어요. 갑자기 웬 아주머니께서 한마디 말도 없이 제 손을 쓰다듬으시더라고요. ‘신기하네, 되게 부드럽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거시면서요. 택시기사 분들도 마찬가지로 서슴없이 말을 거셨어요. 정말 케냐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한국의 아저씨나 아줌마들은 스스럼없이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 같아요.

처음엔 적응이 힘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과 정이 들었습니다. 한국인 여자 친구도 있어요. 한국 사람들은 처음엔 친해지기 힘들지만 한번 친해지고 나면 정말 오래가는 것 같아요. 저처럼 정이 많은 나라인 것 같아 좋습니다. 아, 다만 가끔 저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과 ‘케냐의 길거리에는 코끼리가 돌아다니니?’, ‘집에 사자를 키우니?’ 등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별이라기보다는 잘 모르니 신기해서 묻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 같아요.

TV나 영화에서 보던 이미지와 서로서로 마주하면서 느끼는 실제 모습이 다르단 걸 느낀 적 있죠? 특히 매스컴에선 아프리카의 한 쪽 면만 보여주니 고정관념을 가지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저도 여러분과 똑같은 평범한 학생일 뿐입니다. ‘사람 책’ 역할을 하면서 만난 학생들이 허상의 이미지를 깨고 실제를 마주하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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