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를 좋아한다고 왜 말을 못해, 라고 왜 묻지 못해…

- ‘예술영화’란 용어에 대한 짧은 생각


이후경(영화평론가)



처음 만난 사람이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요”라고 대답하는 편이다. 그러면 상대는 대개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인지, 영화에 관해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기 때문인지, 그저 그 사람 주변에는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이쪽에서 의도하고 그렇게 답한 것은 아니지만, 그 뒤로는 대화도 금방 끝나는 편이다. 적어도 영화 관련 주제에 한해선 그렇다.

2011년, 지금은 그만둔 <씨네21>에 신입기자로 들어갔을 때도 비슷했다. 선배들 앞에서 그해 재미있게 본 영화로 <토르: 천둥의 신>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순간 바로 “토르?”라는 짧은 반문이 돌아왔다. 나중엔 나도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어 누가 왜 그 영화가 좋으냐고 물으면 “얼굴은 꽃미남인데 몸은 갑옷을 벗어도 계속 갑옷을 입고 있는 것 마냥 우락부락한 육척장신이 둘씩이나 나오잖아요!”라며 둘러대곤 했다.

정반대의 경험도 있다. 영화기자 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테렌스 맬릭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 관련 기사를 썼을 때다. 그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으며 영화 팬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그 영화를, 나는 좋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을 정도로 편협한 프리뷰를 써서 거의 항의에 가까운 댓글까지 받았다. 이후로도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의 평가는 여러 지면과 온라인 게시판 등에서 오랫동안 계속됐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로 분류하곤 한다. 이중 상업영화나 독립영화라는 용어는 제작, 투자, 배급의 구조를 반영한 것이다. 맥락에 따라 긍정적인 표현으로도 부정적인 표현으로도 사용될 수 있겠지만, 이런저런 맥락 속에 놓이기 전까지는 비교적 가치중립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예술영화라는 용어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구조적 설명보다 미학적 판단에 훨씬 가깝다. 예술영화란 말은 그 자체로 자기 범주에 속해 있는 영화들의 ‘예술성’을 미리 보증해주는 역할을 하며, 따라서 가치 편향적인 표현이라 봐도 무방하다. 예술영화로 분류된 영화들이 비평 지면에서 더 많이 다루어지고 평자나 관객들로부터 더 쉽게 지지를 받고 사람들에 의해 더 오래 회자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예술영화는 더 깊이 이야기를 나누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예술적인 작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영화=예술성이 있는 영화’라는 공식은 잘못된 것이다. 실제 현실에서 예술영화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어떤 영화의 질적 속성이 아니라 그 영화가 ‘예술영화’로서 생산, 유통, 소비되는 제도적 구조에 가깝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art film’이란 용어는 ‘할리우드 주류 영화’의 반대말이자 ‘예술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유럽 작가 감독의 영화’를 뜻하는 말로 오랫동안 사용돼왔다. 그러니까 예술성이 뛰어난 영화가 예술영화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 감독이 만든 영화, 세계 유수 영화제에 초청 받은 영화, 예술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 영화평론가(혹은 넓게 보아 영화평을 쓰는 문화계 종사자)들이 호평한 영화 등이 예술영화로 분류된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 중에는 정말로 예술성이 뛰어난 걸작도 있고, 이름난 작가 감독의 범작도 있으며, 예술영화를 가장한 평범한 드라마나 진부한 장르물도 있다.

이는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금세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인 동시에 영화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금세 까먹기 쉬운 사실이다. 그래서 종종 해박한 지식을 소유한 평자도 예술영화의 탈을 쓴 범작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곤 한다. 그런 경우 그는 예술영화라는 제도를 작동시키는 적극적 수행자가 된다. 그리고 그가 작동시킨 제도는 특정 영화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고 그 외 영화들을 세속적 예술의 영역에서 함부로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E.H. 곰브리치는 예술‘품’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감상론 중 하나인 <서양미술사> 서론에서 “작품들을 감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암시를 파악하고 모든 숨겨진 조화에 감응하려고 하는 참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그 마음가짐이란 무엇보다도 상투적인 미사여구나 흔해 빠진 경구 같은 것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너무 유쾌하거나 감동적으로 보이는 작품을 좋아한다고 고백할 경우 무식하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참신한 마음가짐을 갈고 닦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9:3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