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안’에서 그리고 우정 ‘앞’에서

민승기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기 객원 교수



주체와 타자의 결핍이 겹치는 이중결핍의 공간이 우정이다.

메시아는 늘 오늘이라고 답하지만 이 ‘지금’은 ‘이미 항상’과 ‘아직 아닌’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친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어 우리는 늘 친구 ‘앞’에 서 있다. 친구 ‘앞’은 그러나 이미 친구의 ‘안’이다. 내가 이미 친구이기 때문에 친구를 대상으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실체 아닌 텅 빈 존재를 ‘함께-나누는’ 내 안의 타자, 친구. 나를 가능하게 해주는 공백, ‘지나치게 가까워’ 서술할 수 없는 우정을 이해하기 위해 아감벤은 그것을 실연한다. 우정 ‘안’에서 그것의 공백과 마주하는 작업. 수행적 반복 속에서 태어나는 친구. 아감벤은 친구인 낭시와 우정이라는 주제로 서신을 교환한다. 그러나 우정의 수행은 오히려 우정 자체를 망가뜨린다. 낭시의 답장은 ‘우정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걸림돌’로 도래한다. 우정은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는 방해물, 스스로를 불가능하게 하는 지나침으로 출몰하는 것이다.

  또 다른 우정의 실연. 결코 해소될 수 없는 내적 간극을 통해 우정의 역사 전체를 회집하고 있는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는 인용이 카소봉에 의해 ‘많은 친구를 가진 자는 진정한 친구가 없다’로 수정되어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내용의 편지가 데리다에게 배달된다. 그러나 이 편지의 수신인이 데리다 임에도 불구하고 아감벤은 데리다를 친구라 명명하지 않는다. 워탐(Simon Wortham)의 말대로 아감벤은 자신도 모르게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를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아감벤은 재현의 거리를 허용하지 않는 ‘과도한 가까움’이 우정이라 주장하지만 과도함은 가까움까지도 분열시킨다. 가까움이 자신을 넘어설 때 즉 너무 가까워 결코 메울 수 없는 거리가 될 때 아감벤은 이미 데리다를 반복하고 있다.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는 인용을 ‘많은 친구를 가진 자는 진정한 친구가 없다’는 진술로 바꾸었을 때 사라지는 것은 수행적인 부름이다. 부름은 언어 속에서 언어의 틈으로 발생하고 있는 타자에게 말을 거는 작업이다. 바로 이 부름이 불연속적인 도약을 통하지 않고서는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을 생성한다. 우정은 스스로를 거부하는,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고(Irving Goh)의 말대로 부름은 주체와 타자 모두를 결핍시킨다. 친구는 소환되는 동시에 부인된다. 타자는 의미체계에 의해 부인되거나 거부되는 배설물의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 반면 친구는 주체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주체를 결핍시킬 수 있다. 주체와 타자의 결핍이 겹치는 이중결핍의 공간이 바로 우정인 것이다.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단지 소통을 위한 소통을 통해 엄청난 숫자의 친구들을 양상하는 지금의 우정 앞에서 데리다는 이렇게 묻는다. ‘누가, 무엇이 도래할지 예측하거나 계산할 수 있는가?’, ‘친구를 수량화할 수 있는가?’, ‘우정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는가?(블랑쇼)’ 데리다는 ‘지금’을 스스로와도 다른 ‘지금’으로 구성하기 위해 ‘지금’ 속에 틈을 기입한다. 디지털 세계에 지배되지 않는 고독한 장소, 상호성이나 유사성, 근접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공백, 동등성이나 공통적인 자질을 중지시키는 틈. 클레망(Catherine Clement)의 말대로 기절/축약(syncope)이 우정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이전과 이후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구성해내는 중지, 자신이 이미 타자임을 느끼게 되는 아포리아의 경험, ‘우정은 (온전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밤의 경험. 블랑쇼처럼 우리도 지금 여기 있는 메시아에게 언제 올 것인가? 라고 물어야 한다. 메시아는 늘 오늘이라고 답하지만 이 ‘지금’은 ‘이미 항상’과 ‘아직 아닌’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오 나의 지금이여, 지금은 없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3:1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