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 『조용한 걸음으로』, 문학과지성사, 2013

임형채, 자유기고가

원로 비평가의 잡문을 읽는 즐거움

원로들의 글은 대체로 쉬우면서 깊다. 일상적인 어휘들인데, 읽다보면 이 말이 이런 말이었나 싶을 때가 있다. 상투적이었던 단어들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의 목격, 그것이 원로들의 글을 읽는 한 즐거움이다.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감당해 온 사람의 말에는 그들의 삶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문학과지성사의 창사자이자 이제는 일흔다섯이 된 원로 비평가 김병익의 산문집 『조용한 걸음으로』가 출간됐다. 김병익은 여기서 “상당히 자유로워졌고 또 그만큼 게을러졌는데 이런 덕에 역사와 현실 혹은 문학과 정신들에 대한 짐을 덜어내면서 그것들을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애써 공들이지 않아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원로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조용한 걸음으로』는 산문집이며 김병익 스스로는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을 잡문이라 칭했다. 『조용한 걸음으로』는 세 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돌아보며, 바라보며’는 문학과 삶과 세상에 대한 그의 에세이들을 모은 것이고, 2부 ‘도저한 정신들’은 살아있는 혹은 죽은 동료 문인들에 대한 기억을 담은 글들이며, 3부 ‘가장자리에서 서성이다’는 <웹진문지>에 그가 연재했던 칼럼들이다. 이 글들은 논문도 아니고 비평문도 아니며 소설이나 시도 아니다. 의도가 없고 형식과 체계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잡문이라고 해서 글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대부 독서계층의 일상 문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한문산문이 바로 잡기(雜記)였다. 잡문의 자유로운 형식 덕분에 그곳에서 작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하게 된다. “이제 우리에게 괴로워하며 진지하게 정색하고 아프게 따지며 힘들여 셈할 일들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허망함을 허망함으로 받아들이는 관용을 나는 요즘 훈련하고 있는데 이 글이 그런 연습의 하나이기를 바란다.”라는 말은 잡문이기에 남길 수 있는 상념이다. 블로그나 SNS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상념은, 그러나 원로에게서 나왔다는 점에서 읽는 즐거움을 독자에게 준다.

물론 원로라고 해서 그의 견해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하거나 감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신군부와 민중주의의 착종 속에서 꾸준히 경제성장을 이룩해 최근에는 드디어 G20 권내에 참여했고, 정치적 민주화도 안정된 정착을 이루었으며, 이러한 과정의 앞에 한글세대인 4.19세대의 주류들의 열정적 활약상이 있었다고 덧붙이면서 김병익이 자긍심을 느끼는 지점 등이 그러하다. 『조용한 걸음으로』에서는 그의 ‘자랑’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유신시절이었던 1978년에 편집자로서 정문길의 『소외론 연구』를 출판하면서, 그는 자신이 편집자의 기지를 발휘해 1장의 제목을 ‘청년 마르크스의 소외론’에서 ‘1840년대의 소외론’으로 바꿨고, 그 덕분에 간행이 허락될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판권란의 간기에 편집과 조판의 결과인 ‘판’과 인쇄기에 얹어 인쇄한 결과인 ‘쇄’를 엄격하게 구분했음을 “소문 없이 자랑하고 싶”다고 하기도 한다. ‘조용한 걸음으로’ 가고 싶다면서 왜 이리 자랑이 많은지. 게다가 책 말미에 붙인 짧은 글은 ‘마지막에서 두번째의 것으로’라는 무척 요란스러운 제목을 달고 나왔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이야말로 원로 비평가의 잡문을 읽으며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조용한 걸음으로』를 읽다 보면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일흔이 넘은 원로에게도 자신을 긍정하는 일은 무척이나 소중한 것임을 독자는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이해의 경험들이 모였을 때 지금 한국의 세대 간에 형성된 넓고 깊은 간극을 메울 수 있을 것이라 하면 너무 과도한 의미부여일까? 소개가 길었다. 김병익이 낸 산문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