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기억

영화가 현재의 서사를 위해 무언가를 기억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억 그 자체로 활동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기억으로 활동하는 영화

남다은(영화평론가)

1959년,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이 세상에 공개되자, 당대의 비평가들은 “여기에 영화적인 레퍼런스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이 영화의 새로움에 충격을 표했다. 질 들뢰즈도 그의 위대한 저서 <<시네마>>의 두 번째 권인 <시간-이미지>에서 “레네와 함께 영화 이미지는 공간과 운동의 문제가 아니라 위상학과 시간의 문제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당대의 지적인 비평가들이 <히로시마, 내 사랑>을 모던 시네마의 혁명적인 시작점으로 평가할 때, 그들은 공통적으로 이 영화가 역사적 상흔에 대한 기억을 영화적 시간 안에서 구현해낸 형식의 혁신성에 대해 말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영화적인 탐구이다. 집단적인 기억과 개인적인 기억은 어떻게 서로를 품을 수 있는가. 과거와 현재, 미래가 직선적인 시간의 층위에 놓이지 않는다면, 이들은 서로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 때 주체의 현재에 출몰하고 침투하는 과거의 이미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과연 기억을 불러오는 명징한 고정점으로서의 주체란 가능할 것인가.

두 번의 세계대전이 지나는 동안, 세계를 인과관계 안에서 파악하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고, 그렇게 부서진 세계를 전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주체 또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기존의 영화적 관습으로는 변화한 세계와 균열된 주체의 정신을 형상화하기 어렵다는 깨달음이 <히로시마, 내 사랑>의 파편적인 이미지와 실험적인 몽타주를 낳았을 것이다. 여기, 독일군과의 금지된 사랑으로 상처 입은 프랑스 여인의 기억과 히로시마라는 역사적 상흔의 기록이 교차하고 겹쳐지며 현재화되고 있는데, 마치 이들은 프랑스 여인과 일본인 남자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비추는 것 같지만, 실은 서로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있다. 영화는 둘에게 공통된 기억의 준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 각각이 기억하는 과거는 되돌아와 안착할 현재라는 안정되고 고정된 정박지 또한 갖지 못함을 부유하고 어긋나는 이미지와 사운드들로 표현한다. 말하자면 과거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복원해서 현재의 균열된 틈을 메우고 내러티브를 완결하는 것은 레네의 영화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인 기억의 영화에서 플래시백이 쓰이는 방식을 레네는 철저히 지양한다. 현재를 이해시켜주는 기억, 주체가 명확한 기억, 일관된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기억은 레네의 것이 아니다. 대신, 그의 플래시백은 현재에 불쑥 틈입하지만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채, 현재의 주변을 떠도는 트라우마로서의 기억이며, 궁극에는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 개인과 집단, 나와 너의 경계를 모두 흐린다. 그것은 마치 망각을 거부하며 환각처럼 현재를 부유하는 기억에 가까우며 기억의 주체가 지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불분명한 기억의 형식으로 영화의 미학과 윤리를 지탱하는 영화는 비단 역사적 주제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플래시 백을 즐겨 사용하는 감독이 아니기에 조금 의외의 예이기는 하지만, 홍상수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기억은 의문을 남기는 것이어야지, 무엇이 ‘진실’인지를 판정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시점을 교차하거나 달리하고 반복을 통해 차이를 보며 직선적 시간관의 복구가 아니라 점점 넓게 펴지는 면의 결들을 창조해온 그에게 이 말은 너무 당연하다. 이를테면 <하하하>는 그런 홍상수의 태도가 영화적 활기로 충만함을 획득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회상을 시작하는 현재는 흑백 스틸사진으로 정지되어 있고, 두 남자의 생기로운 목소리로 불려나온 과거의 기억은 컬러로 된 움직이는 세계다. 남자들의 목소리에 의해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시간의 축이라고 말하기 망설여지며, 여기서 과거와 현재는 각기 다른 차원에 속한 세계처럼 느껴진다. 목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점점 더 알기 어려워지고, 스틸사진의 현재는 과거의 풍성한 기억을 감당하고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얇고 투명해 보인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며 우리는 과거가 돌아올 수 없다면 그것을 기억이라고 부르는 게 온당하기는 한가, 기억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들은 여기 있는데, 거기 시간성을 부여하기 어려워진다면, 도대체 이 기억의 정체는 무엇인가, 묻게 되는 것이다.

시대도, 맥락도, 기질도 다른 두 영화들이지만, 우리는 이들이 공유하는 영화적 태도에 대해서만큼은 말할 수 있다. 이들에게 기억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그 때 기억은 서사를 일관되게 완결시켜주는 역할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지속적으로 활동하며 우리가 너무 쉽게 진리 혹은 진실이라고 믿어 온 가치들, 통념들, 시간들을 흩어지게 하고, 현실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영역들, 사소하게 치부되어 죽어가던 순간들, 은폐되었던 상처들을 망각에서 깨어나게 한다. 망각에서 깨어난 것들이 생기롭게 움직이는 영화적 시간. 그래서 이들의 기억은 언제나 꿈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