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소한인(在所韓人)이 아니라 재소한인(在蘇韓人)이다. 그러나 얼핏 귀에 처음 전해오는 느낌처럼 그들의 기구한 역사와 운명은 어쩌면 저 유라시아 대륙이라는 광활한 땅덩어리를 통째로 감옥 같이 여기며 살아온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통한의 150년 역사인지도 모른다.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USSR)’이란 단어가 ‘소련(Soviet Union)’이라는 약칭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더 익숙했던 시절부터 이제는 ‘독립국가연합(CIS)’이라는 새로운 국가정체성이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도 낯선 그 땅에 150여 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건너가 살았다는 사실을, 그들을 우리는 무심하게 ‘카레이스키’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시대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이라는 핵심교양 수업시간에 만난 우리 학교 후배제자들은 그리 충분하거나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듯이 보였다. 우크라이나와 우즈베키스탄이 여전히 혼란스러운 이 땅의 청년들에게 김올가, 박따냐, 한옐레나, 허가이뱌체슬라프, 유가이베로니카, 김게르만, 송찌나 같은 이름은 어떤 온도와 느낌으로 다가갈지 무척 궁금하다.

19세기 중반부터 압제와 추위와 기근과 홍수를 피해 두만강을 넘어 국경을 자발적으로 넘어간 사내들과 아낙네들의 후예가 2014년 역사적 조국인 한반도를 향하여 대장정의 자동차 랠리를 펼치며 분단된 휴전선을 넘어 부산까지 왔던 것을 기억하는가? 왜 그들은 그 멀고도 험한 길을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렇게 연어의 회귀처럼 돌아와야만 했던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문이 열린 소련과의 문화교류에서 남류드밀라는 왜 울먹이며 자신들이 중국의 조선족과는 다른 ‘고려인’의 삶을 살고 있노라고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무대에서 피토하듯이 노래 불렀어야 했던가?
1990년 한소수교가 이루어지고 이듬해 소련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우리는 그동안 단절되어 있었던 소련, 러시아, 슬라브 지역의 언어, 문화, 문학, 사람에 대한 전면적인 이해의 폭을 단기간 내에 넓혀야만 했다. 동시에 같은듯하면서도 다르고 다른듯하면서도 너무나 동질적인 우리의 한인동포 고려인사회와도 어색한 조우를 해야만 했다. 그 시절 서울대 인류학과 이광규, 전경수 교수의 공동저작으로 출간된 이 책 은 국내 학계에서 최초로 시도된 고려인 동포사회에 관한 체계적인 문화인류학적 보고서로서 그 의미를 지닌다. 재외한인 동포사회에 대한 수많은 연구 중에서 필연적으로 단절되고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 중앙아시아, 우크라이나, 시베리아, 극동, 사할린 등지의 고려인들의 역사와 문화와 생활풍습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화두를 던져준 이 책은 향후 수많은 후학 연구자들에게 소중한 길라잡이가 되어주었다. 그들 중의 한사람인 필자도 1991년 이 책의 현장답사와 연구와 집필이 이루어지던 그 시점에서, 한국사회 최초의 재소동포 대학생 한글학교 교실의 부담임으로 위의 타냐, 나타샤, 레나, 올가, 빅토르, 이고리, 막심 등을 만났고, 필자의 주전공인 노어학 연구 이외에도 ‘유라시아 한인연구’라는 방향으로 공부의 외연을 확장해오고 있다. 그러나 공부보다 더 중요한건 마음, 그리고 행동. 실천이 따르지 않는 지식은 허무하고 지적 기반이 없는 무모한 행동은 공허할 뿐이다. 빚진 자의 마음을 늘 초심으로 간직하되, 지나친 동정과 연민의 감정으로 우리의 연대와 협력을 값싸게 떨어뜨릴 필요는 없다. 일대일로 만나는 우리는 누구라도 이 질곡의 역사 속에서 필연처럼 던져진 하나의 개별적 자아로 존재하기에 재소(在所)든 재소(在蘇)든 상관없이, 재러든 재중앙아시아든 관계없이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서로 발견하고 북돋워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후손들에게 죄짓는 못난 조상이 되는 길만큼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1654년 제1차 나선정벌을 통하여 처음 만나고, 1854년 동해안 항로 측정을 목적으로 나타난 러시아 해군 중장 푸티아틴 함대의 약탈을 통한 아픔을 싸매고, 1864년 유라시아 대륙으로의 먼 유랑길에 오른 고려인. 1884년 조러통상수호조약으로 정식 국교를 수립하고, 1904년 노일전쟁의 싸움터로 우리 산하를 내어주고, 이제 다시 새로운 시대를 여는 2014년 여름 ‘등짐을 지고 산을 넘고 내를 건너던 조선의 사내들과 아낙네들’은 그 기억을 더듬어 연어가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오르듯이 모스크바를 시작으로 볼가강을 건너 시베리아를 지나, 중앙아시아 사막땅 우슈토베를 거쳐서 실크로드를 따라 다시 극동의 연해주로 북한으로 그리고 남한으로 몸소 순례의 대장정을 마쳤다. 그러나 그 뒤에 남은 건 눈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뿐이었다. 그 눈물의 의미에 대해서 고대생들은 무어라 이야기할지 새 학기 개강과 첫 수업시간이 기다려진다.

김진규 문과대 교수· 노어노문학과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9 16:4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