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라고 말하고 나면 입술끝엔 풋내음이 남는다. 덜 익어서 시고 떫은 과일처럼 한입 베어 먹은 것을 후회하기도 하지만 고즈넉한 가을녘이면 다 익을 것을 기대하며 미소를 짓게 한다.

겨울방학에 방송부 시험을 보겠다고 모였던 교실에서 그 아이를 처음 봤을 때, 여느 소설책처럼 머리에 종이 울리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어!’하고 외쳤던 것 같다. 그 아이와 나는 같은 독서실을 다녔는데 독서실비가 비싸 그전에는 한 번도 휴게실에 가본 적이 없던 내가 매일 혹시나 하며 휴게실에서 공부를 했었다. 걔가 친구들이랑 휴게실에 정말 쉬러 올 때면 나는 더더욱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소란스러운 소리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가 내 뒤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어깨위에 올라타 있는 것 같았다. 잔뜩 남은 문제집은 나와 그 아이 사이의 거리감을 말하는 것 같아 더 속상했다.

친구의 친구라 친해지고 나서 같이 방송부 합격자 명단에 있는 걸 보자마자 상상인지 망상인지 구분 안되는 미래를 그리며 렌즈를 끼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렌즈를 거부하는 눈과 눈물 콧물 흘리며 전쟁을 하고,  아침밥을 거부하는 나에게 잔소리하시는 엄마와 전쟁하느라 당시는 되게 바빴다.

간신히 친해진 그 아이와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물론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 일관했지만 머리 한 켠에는 호들갑스러운 나와 티내지 않아도 날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내가 시끄럽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입시폭풍 후 텔레비전에 모범생들이 ‘교과서로만 공부했어요’ 하는 말을 안 믿는 것처럼 소설 속 연인들이 아름다운 세상을 묘사하는 것을 안 믿었다. 하지만 내가 엄마가 아니고 친구가 아닌 사람을 나와 다른 사람으로 인정하고 좋아한다는 사실은 내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퀴퀴한 교무실 옆 방송반은 친구들이 모여있던 교실보다 더 좋은 곳이었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철쭉이 이쁘다는 걸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내 샤프가 이쁘다는 친구에겐 빌려주지 않던 걸 몰래 챙겨주고 의욕적으로 맡은 방송부장 권한을 남용하여 걔랑 나를 한 날에 배정하기도 했다. 아침 15분마다 보는 게 어찌나 좋은지 학교는 싫으면서 학교 가는 건 좋았다.  

방송부 일년이 얼마나 짧던지, 졸업식 날은 벌써 왔고 고사리 손으로 만든 초콜릿은 전해주지 못했다. 전교회장이라 하필 방송반에 없었던 탓이었다.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어 갔던 터라 들고 돌아가기엔 민망했고 교무실의 선생님들께 드리며 일년 간의 짝사랑도 학교 어딘가에 조각내 가두기로 했다.

간혹 듣는 그 아이의 소식은 일부러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방송반에 가면 항상 있던 너도, 같은 샤프를 쓰며 같이 숙제하는 너도 없지만 그때의 기억은 온전하게 남아있기에 새로운 기억으로 채색하고 싶지 않다. 덜 익은 열매와 첫사랑은 닮았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첫사랑은 풋내음을 간직한 채로 익지 않기를 바란다. 내 머리속에서만 기대하며 영원히 어리게 꿈꾸고 싶다.

황혜진 (정경대 행정14)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2 13:4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