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침략을 우리나라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다. 우리의 힘이 일본보다 강했다면, 공격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리다. 그 시대에는 유럽의 많은 국가도 일본처럼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느냐는 말도 덧붙인다. 유럽의 나라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했다면, 일본의 침략이 용인되는 것인가? 조금이라도 힘이 세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발휘하여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옳은 일인가?
우리 몸의 어떤 장기도 자기의 능력을 100% 발휘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뇌를 10 %도 쓰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한다. 정확한 %를 계산하기는 쉽지 않으나, 뇌가 상당 부분을 여유로 남겨두는 것은 틀림없다.

폐활량은 힘껏 들여 마신 뒤, 최대한 내뱉은 공기의 양을 측정한 값이다. 성인 남자의 폐활량은 5L 정도된다. 그러나 우리가 평상시에 호흡하는 양은 폐활량의 10%인 500mL 정도에 불과하다. 뇌처럼 어마어마한 여유 공간을 갖고 있는 셈이다. 심장이 1분간 박출해 내는 피의 양은 5L정도 된다. 심장이 1분에 72번 뛰고, 한번 뛸 때 70ml 정도의 피를 내보내므로 둘을 곱하면 5L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운동을 하면 심장이 빠르고 강하게 뛰기 때문에 1분에 박출해 내는 피의 양이 최고 25L 정도까지 증가된다. 이렇듯 우리 몸의 모든 장기가 평상시에는 자기 능력의 일부만을 쓰고 있으니, 뇌만 콕 찍어 탓하지 않기 바란다.

몸무게가 70kg인 사람의 혈액량은 5L 정도 되며, 심장에서 출발한 동맥피는 소동맥과 실핏줄을 통해 각 장기에 공급된다. 소동맥은 혈관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수축과 이완이 잘 되어 수도꼭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 우리 몸은 이를 이용하여 운동을 할 때는 골격근이나 심장의 소동맥은 열고 다른 장기의 소동맥은 닫아버리는 반면, 밥을 먹고 소화를 시켜야 할 때에는 다른 혈관은 닫되 소화기관의 소동맥을 열어 소화기능의 효율성을 높인다. 밥을 먹자마자, 수영과 같은 격렬한 운동을 하지 말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모든 장기가 자기 자신보다는 전체를 생각하며 좀 더 필요로 하는 장기에게 혈류를 양보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배려의 미덕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무리를 이루어 왔고, 체계적인 공동사회를 만들었다. 배려는 공동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자 남과 조화를 이루는 연결고리이다. 예의범절이나 법과 질서 등 우리 사회의 규약은 상대방을 위한 배려에서 출발한다. 모든 성인들은 제각기 다른 표현으로 인간의 도리를 표현했지만, 그것을 꿰뚫는 공통된 원칙은 바로 내 마음속에 남을 위한 여유를 남겨두는 것이다. 배려는 선택이 아니다. 공존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동양화의 매력 중 하나는 여백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다 채운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지 않고 남겨둔 여백, 거기에도 예술은 존재하는 것이다. 여백이 미로 승화된 이유는 보이지 않는 것의 의미가 보이는 것 못지않게 깊고 넓기 때문이다. 비움의 미학을 갖는 여백은 너그러움으로 비유되며, 지나치지 않음을 뜻하기도 한다. ‘여백의 미’가 동양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서양화에서 쓰이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도 ‘여백의 미’를 지향한다. 스푸마토는 ‘연기 속으로 홀연히 사라진다’는 의미의 이태리어 스푸마레(sfumare)에서 유래된 말로, 이 기법은 색깔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아서, 안개에 싸여 차차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스푸마토 기법으로 모나리자 눈썹과 입 주위를 애매하게 남겨, 보는 이로 하여금 완성하고 싶게끔 하는 여지를 남겼다.

남의 논문을 베끼면 표절로 낙인이 찍혀 곤혹을 치르지만, 자연의 오묘한 현상을 밝혀 세상에 알리면 고소당하는 일 없이 위대한 발견이나 발명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내장장기가 자기 능력의 상당부분을 남겨놓는 여유나 절실한 부위에 혈류를 양보하는 배려심을 곱씹어 본다면, 개인끼리는 물론 국가 간에도 일제의 침략과는 전혀 다른 상생의 멋들어진 관계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흥식
의과대 교수·의학과 생리학교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2 19:4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