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세평] 언어의 상상력

▲ 이종태 교수

금년은 내 개인적으로 일상적 업무와 연구 부담을 잠시 덜 수 있는 연구년을 보내는 해이다. 이곳저곳을 저울질 하던 끝에 그간 공동연구 경험으로 알게 된 이곳 미국 예일대에서 일 년간의 연구년을 보내기로 했다. 뒤늦게 도착한 이곳은 눈폭풍에 이은 한파로 서울과는 전혀 다른 설국 감상도 잠깐이었고, 폭설과 한파에 적응하느라 늦은 출국을 후회할 정도였다.

생활용품을 구하려 들린 점포에서 물건값을 지불하다가 예전 미국에서의 정착 초기에 경험한 작은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이미 석사학위 과정을 같은 영미권인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이년여의 시간을 보내고 미국에 온 터라 간단한 생활영어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 아닌 자신감이 있었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포장을 기다리는 내게 담당점원의 간단한 질문 두 마디가 내게 의미 모를 소리로만 들렸다. 재차 질문의 요지를 재촉한 끝에 그 말이 ‘paper or plastic?’이라는 어려운 단어도 긴 문장도 아니라는 사실에 당혹스러웠다. 이후에도 두 세 차례 비슷한 실수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캐나다의 매장에서는 구입물건을 언제나 비닐봉투에 넣어주었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사회적인 친환경운동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물건포장을 손잡이가 있는 비닐봉투와 손잡이가 없는 재활용 종이봉투 중에서 선택하게 하는 일종의 생활습관 차이가 있었다. 그 지역 그 사회 사람들의 풍습과 문화적 특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과 그렇지 못한 차이가 자아낸 작은 에피소드인 것이다. 이렇듯 언어란 단순히 사전적 의미 이상의 생활습관이나 문화적 상상력, 경험의 산물이 오롯이 녹아들어 있다.

이렇게 언어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내가 전공으로 하는 환경보건분야의 여러 학문적 용어가 서구권에서 이미 오래전에 정의되고 사용하는 것을 우리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적합하지 않는 단어로 바뀌어서 오는 오해를 들 수 있다. 이렇게 부적합하게 번역된 용어가 학문분야에서 잘못 사용되는 것도 문제지만 국가정책 수립과 활용의 경우에는 보다 큰 혼란과 비용낭비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4년 환경부 환경정책실 산하에 환경보건정책과가 신설되면서 본격적으로 정부주도의 환경보건 활성화가 이루어졌다. 이와 더불어 정부주도로 소위 ‘환경보건종합 10개년 계획(이하 종합계획)’이란 것이 기획되었다. 이 종합계획의 내용에 따라 2008년 3월 ‘환경보건법(이하 법)’이 제정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종합계획과 법을 구성하면서 전문가들이 고민하였던 것은 종합계획이나 법 구성의 주요한 뼈대로 삼을 원칙을 선택하여 표방하는 것이었다. 이 때 선택된 주요한 원칙 중의 하나가 ‘a precautionary principle’는 것이었다. 이를 ‘사전예방적 원칙’ 또는 ‘사전주의적 원칙’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다수의 전문가 합의에 의해 ‘사전예방적 원칙’으로 결정되었다. 1992리오 선언(원칙 15항)에서 정의된 ‘a precautionary principle’은 정책적 수단의 선택과 집행에 있어 지역사회에서의 환경위해가 확인되는 경우, 정책집행 대상과 위해의 과학적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가 그 당면한 정책집행 수행을 억지하는 것으로 활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가 ‘사전예방적 원칙’으로 번역되면서 일반인 또는 언론을 통해 해석과정에서 본래 의미는 퇴색하고 단어로서의 의미인 환경위해 요인에 대한 예방적 조치 또는 조사활동의 강화라는 전혀 다른 뜻으로 활용되게 되었다. 정리하면 사전주의 또는 사전배려의 원칙이란 공공의 복리와 보건적 차원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정책적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원리로 작동하는 것으로 우리 환경보건정책에 있어 대단히 선진적인 기본 원리였다. 하지만 이것을 ‘사전예방적 원칙’으로 번역해 공표되면서 우리말로서의 의미만 남아 본래 취지와는 매우 다른 의미로 이해되고 사용되게 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정책적으로 많은 오해와 불신을 야기하는 이유가 되었고, 이를 되돌리기 위한 노력과 수정은 불필요한 시간과 비용 지출을 초래하게 되었다. 요즘은 글로벌시대로 언어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이 때 교류란 상호간의 생활문화적 이해 뿐 아니라 정확한 정보전달을 위한 용어선택의 치밀성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종태 보과대 교수·보건과학과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2 20:2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