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정오 교수

  인종도 다르고, 지리 조건도 다르며, 둘 사이에 놓여있는 거리까지도 멀지만 어딘가 많이 닮아 있어 서로 짝패를 이루는 두 국가가 있다. 바로 독일과 일본이다. 제국주의 전범으로서의 전과와 패전 이후의 사회·경제 위기, 그리고 각 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들의 생산품, 그것을 통한 극복 등 두 국가가 걸어온 길이 닮아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인지하는 사실일 것이다. 여기에는 후발 근대국가인 독일을 일본이 국가체계의 모범으로 삼았던 문명적인 이유와 함께 19세기 자연과학의 중심 언어였던 독일어의 개념들과 독일관념론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던 학문적인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에서 추론되는 논리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국가를 동시에 떠올렸을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인상은 사뭇 다르다.
일본은 독선적인 대외정책 결정으로 종종 이웃나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왔다. 국사교과서 문제, 야스쿠니신사참배 문제,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개헌시도 등이 이웃나라를 배려하지 않고 결정한 일본의 대표적인 정책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일본 아베총리가 미국 정부에 5억 달러를 들여 미국의 역사교과서까지 수정하려고 노력한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는 일본 정부의 그러한 행위에 대하여 안타까운 생각까지 든다. 일본이 돈을 들여 자국을 홍보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것의 결과가 과거사를 지우고 동북아의 갈등을 되풀이하게 되는 행위의 결과로 보여질 때 이웃나라들은 참을 수 없게 된다.

  독일의 경우는 어떠한가? 독일은 1952년 9월 10일 이스라엘과 배상협정을 조인하여 유대인 학살에 대해 34억 마르크를 배상하기로 하였다. 1970년 12월 7일 현직 서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유태인 위령탑 아래에 무릎을 꿇고 온 몸으로 사죄했던 것은 요즘도 종종 회자되곤 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더 나아가서 브란트 정부는 독일동부국경은 통일정부가 성립된 후에 자유롭게 결정한다는 원칙 하에 폴란드와 화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당시에 독일이 동서화해를 목표로 실행한 동방정책은 냉전의 긴장을 완화시켰고, 이는 20년 후의 독일통일에까지 간접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쳤다. 이 밖에도 독일의 역사 반성에 대한 사례들은 베를린의 크로이츠베르크에 위치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기억하기 위한 유태인 박물관,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비, 나치에 가담했던 전범자 추적 및 재판, 각계 지식인들의 반성이 담긴 연구와 저서 등 수도 없이 많다.

  과거사의 사죄와 화해를 바탕으로 세계무대 속의 독일은 옳다고 생각되는 정의를 주장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 공식적으로 미국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운 적도 수차례 있고, 우크라이나 반군에게 암묵적 지원을 하는 러시아를 비판하기도 한다. 또한 최근 앙겔라 메르켈 현 총리는 일본을 방문 중에 일본 정부가 과거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완곡하게 우려를 표해서 이슈가 되었다. 세계정치의 약육강식은 소위 정글 같다고들 한다. 때문에 독일의 이러한 인본적 발언과 행위들이 오로지 이해관계를 떠난 정의만을 위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저의는 차치한다손 치더라도 독일이 보여준 모습은, 우를 범했던 과거 민족주의 국가에서 현대 법치주의 국가로의 이행이 꽤나 성공적이었다는 방증이 될 수는 있다. 민족, 조국 등의 낡은 가치를 지양하고 새로운 가치를 모색한 독일의 현재 정체성은 과거에 대한 책임과 도덕의 의무, 정의의 실현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비슷한 생각을 하며 비슷한 길을 걸어온 일본과 독일은 갈림길에 섰다. 개인적으로 만나본 여러 일본인들, 매체를 통해 접하는 비판적인 지식인들과 일본 정부의 입장에는 분명 괴리가 있다. 평범하고 선한 개인들이 모여 옳지 못한 사회를 이룬다는 아이러니는 언제나 놀랍고도 씁쓸하다. 나는 집단과 사회는 믿지 않지만 그에 선행하는 낱낱의 인간은 믿는다. 이치에 맞지 않는 역설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역설에는 작은 계기를 통한 집단과 사회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이웃나라의 정치적 변화가 언젠가는 도래하리라고 굳게 믿고 싶다.

안정오 인문대 교수· 독일문화정보학과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08: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