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이게 다 '오겡끼테스까'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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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따끈한 학내 소식을 전합니다.

익명
고대신문 | 등록일 : 2015-03-24 18:52:16 | 글번호 : 6250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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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고의 영화, ‘헤드윅(Hedwig And The Angry Inch, 2000)은 정말 100번 넘게 보았다. 컷 별 로 외웠을 정도다. 알뜰히 화면 곳곳에 디테일을 숨겨 놓는다는 봉테일, 봉준호 감독의 영화도 반복한 편인 데 엊그저께 다시 본-진짜 10번 넘게 봤다-’살인의 추 억(2003)’은 역시나, 후! 데이빗 핀처와 크리스토퍼 놀 란 감독의 필모그래피 속 국내 개봉작도 모두, 적어도 3번 이상씩 봤을 거다.

하릴없이 같은 영화 다시 보기가 취미라는 이야기 를 하고 싶은 건 아니고(실제 취미이긴 함), 최근 겪었 던 일을 말하려는 거다. 우연히 주말 저녁 TV 를 틀 었는데 EBS 채널에서 이와이슌지 감독의 ‘러브레터 (1995)’가 방영되고 있었다. 러브레터라니, 하늘거리는 커튼 사이로 벽에 기댄 ‘남자’ 후지이 이츠키의 콧 날과 눈썹, 설원의 ‘오겡끼데스까?’까지, 20년 가까이 숱하게 패러디됐던 대사와 귀에 익은 OST로 대표되 는 영화 아닌가. 기시감이 느껴졌고, 자연스레 채널을 돌리려 했다.

그 찰나, ‘어? 러브레터에 저런 게 있었나?’ 싶게 낯 선 장면과 대화가 눈앞에 펼쳐졌다. 분명 ‘알고 있다’고 생각한 영화였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많 이 지나서겠지’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아니었다. 동명 (同名)의 두 주인공의 학창 시절 에피소드들은 마치 처 음 보는 것처럼 새로웠다. 폭설 내리던 날, 독감으로 쓰 러진 여 주인공을 들쳐 입고 나서는 할아버지와 이를 말리는 어머니가 나누는 대화는 어찌나 처음 보는 것 처럼 생소하던지. 박진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여러 차례 본 영화일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실제 내가 러브레터를 몇 번이나 다시 봤더라? 돌이 켜보니 여느 영화처럼 숱하게 본 것도 아니었다. 십 수 년 전, 끽해야 한, 두 번 봤을까? 평균의 기억력으론 잊 는 게 당연한 상황인데도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기시 감을 느끼고 ‘아, 나 이 영화 외울 정도야’라고 생각했 던 내 자신이 우스워졌다. 러브레터의 함정은 ‘오겡끼 데스까’였다. 본질(스토리)을 대표하지 못하는 일부 (오겡끼데스까)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복(패러디 등 각종 매체에서 인용)되다 보니, 전체를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 거다.

우리 스스로 ‘알고 있다’ 자만해 곁에 두지 않고 들 여다보지 않은 것 가운데 러브레터같은 영화가 숨어있 다면? 얼마나 살 떨리게 무서운 일인가? 러브레터가 얼마나 재미있고 훌륭한 영화인데! 20년 전 만들어진 영 화인데도, 어찌나 세련되고 감동적이던지! 내가 이 영 화의 진가를 충분히 즐기지도 않고 지나칠 뻔 했다니!

해가 갈수록 그 친구가 그 친구 같고, 그 교수님이 그 교수님 같고, 전공도, 캠퍼스도, 그냥저냥 지나치 게 될 테다. 새내기 시절에야 사소한 것에 호기심 갖고 즐거워했지, 학기가 반복되고 학년이 올라가면 주변 의 익숙한 것들에 시들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실은 상 대를 ‘알고 있다’ 착각한 이유 때문인데. 좀 더 다가가 면밀히 들여다보면 ‘아, 이런 면이 있었어? 싶게 생경 한 이야기가 시작될 수도 있는데.

3월이다.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 가운데 진가를 알아 보지 못해 지나친 것들이 있진 않은지 둘러보자. 2배, 3배로 풍성해진 일상의 경험이 시작될 것이다.

류란 동인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1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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