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 오르게 하는 것

학창시절 친구와 산에 오른 적이 있다. 산 중턱에 접어들어 숨이 턱에 찰 즈음 한 친구는 힘들게 오르고 내려올 정상에 굳이 오를 이유가 없다며 초입에 있는 조계사 또는 민박집에서 기다리겠다는 언질을 하고는 우리 일행과 떨어지게 되었다. 가벼운 웃음으로 친구를 보내고서 온 몸에 땀이 저리도록 정상을 올랐다. 정상 바위에서 고생 끝에 찾아오는 꿀맛 같은 성취감도 잠깐, 한 무리의 또래 여성 등반객들이 우리 곁에 오며 “혹시 김??씨 친구분들 아니세요?”하고 물었다. 어떻게 그를 아느냐며 의아해 하며 되물었을 때 그녀는 “지금 그 분 저희 일행과 올라오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순간 상황이 파악된 우리는 그 친구의 간교함(?)에 박장대소 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오래도록 친구들이 모이면 나누는 즐거운 안주거리가 되었다.

돌아가신 법정 스님은 “산에 오르면 사람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온전히 두 발과 온 몸으로 버티며 산을 오르다보면 주변 사람은커녕 자연경계조차 신경 쓰지 않게 되니 자연스럽게 주변으로부터 격리되게 된다. 산에 오르면 육체적 힘듦에 잠시라도 현실에서 해방되었다가도 하산 길에 이르면 주변과 다시 합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많은 이들이 힘듦을 마다하지 않고 고된 산행을 하는 이유는 정상에 오른 뒤의 성취감과 하산 길의 자연과의 합치에서 오는 만족감 등에 대한 즐거운 상상 때문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언급했던 친구처럼 정상을 밟아 보지 못하고 그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느껴보지 못하였다면, 산행의 고통과 어리석음에 대한 편견으로 지내지 않았을까?

내가 학문적으로 전공하고 있는 분야인 역학(Epidemiology, 疫學)은 유학을 떠나던 1980년대 후반 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이 분야 전공자가 거의 손꼽던 때였다. 따라서 유학을 가서도 주변 선후배가 전무한 형편이어서 전공분야에 대한 기본지식을 습득하는 데에도 몹시 고생을 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다행히 좋은 지도교수들을 만나는 행운이 있어 어렵사리 학위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특히 석사과정 때의 지도교수인 Prof. Bernard Choi는 같은 아시안이고 첫 지도학생인 내게 각별한 지도와 관심을 기울여줬던 기억이 생생하다. 졸업을 앞두고 Prof. Choi의 초대로 집에서 저녁을 함께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그 때 한 폭의 동양화에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을 눈치 챈 교수님은 그 그림이 당신이 이곳 토론토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이수하던 시기에 힘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그린 것이라며 그림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그림은 찌를 듯이 높은 바위산이 있고 그 뒤로 구름을 뚫고 또 하나의 바위산이 솟아 있는 것이었다. 교수님의 설명은 앞에 있는 산이 당시에 교수님이 맞닥뜨린 어려움(학위과정)이고, 뒤 쪽 산은 학위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 닥치게 될 취직 등에 대한 고민으로서 앞산을 오르기 전에는 그 산만 보이고 그것만 오르면 나머지 인생과 시간은 평탄할 것 같은데, 막상 산을 오르고 나니 그 너머 또 다른 산이 보이더라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짧지 않은 내 생애를 돌이켜보아도 많은 굴곡이 있었다. 매순간 힘들더라도 눈앞의 고갯길을 정면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정상에 오른 뒤에 맛보게 되는 즐거움과 기쁨의 경험이 온전히 있기 때문이고 이러한 경험치가 쌓일수록 또 다른 인생의 어려움에 당당히 대응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생긴다는 소박한 신념 덕분이다. 인생이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 ‘산 넘어 산’인 까닭에 보람과 성취감에 대한 경험과 기대감이 없다면 제 1번 산을 멀리 돌아 가야하고 다시 맞닥뜨릴 제 2번 산도 돌아갈 궁리를 하게 될 것이다. 인생길이야 제 2번 산만 있을까? 젊은 시절의 고생과 노력은 뒤이어 올 고난길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맷집과 내공에 대한 투자가 아닐까?

오랫동안 병마로 힘들어하시던 아버님께서 최근 내가 이곳 미국에 있는 동안 고인이 되셨다. 삼사 개월은 능히 버티실 줄 알았는데 너무 황망히 가셔서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이 가슴에 대못이 박힌 듯 여지없이 나를 옥죄고 있다. 노년기에 접어들며 이런저런 이유로 축 처진 아버지의 어깨를 자주 보게 되면서도 친근한 대화상대가 되어 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이런 순간이란 또 다른 산을 마주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힘겨운 산행 끝에 마주하는 정상에서 안도하는 것인가? 그래서 스님은 “우리는 그 품안에 가까이 다가가 안기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던 모양이다.

이종태 보과대 교수, 보건정책관리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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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6 10:4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