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람실의 무거운 공기에 지칠 때면 밖으로 나와 본관 주위를 서성이곤 한다. 그 때마다 눈 여겨 보는 것이 바로 본관의 후문 양 옆에 새겨진 무궁화 조각이다. 스쳐 지나가다 보면 아무도 모를 정도로 작지만, 나는 이 무궁화 조각을 바라볼 때마다 왜인지 모를 위로를 느끼게 된다.

처음 이 무궁화를 조각할 때에 일제는 독립을 염원하는 뜻으로 민족의 상징을 넣으려는 것 아니냐며 서슬 퍼렇게 추궁했다 한다. 결국 인촌은 이것은 무궁화가 아니라 벚꽃이라는 거짓을 둘러대야만 했다. 조각 하나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의 비루함에 마주했을 때 아마 인촌은 눈을 질끈 감았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은 터널의 어둠에 몸을 떨면서도, 그는 조용히 안암의 언덕에 돌을 쌓았다. 그 단단하다는 화강암만을 고집해가며 물 샐 틈 하나 없이 네모반듯한 들들을 쌓고는 그 위에 자그마한 무궁화를 얹었다.

얼마 전 모 유력지가 청년 세대를 ‘달관세대’라 지칭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요즘 청년들은 돈벌이는 물론 출세에도 관심이 없다며, 주어진 삶의 조건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21세기형 안분지족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을 덧씌워서 말이다. 물론 포장의 이면에는 요즘 세대들에게는 청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도전정신이 없음을 꾸짖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일 테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달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어느 때보다도 불확실한 미래는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고, 점점 고착화되어 가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는 우리를 질식시키고 있다. 미생이기를 강요하는 시대의 추궁 앞에서 오늘의 청년들은 인촌이 보았던 것과 같은 길고 긴 터널을 본다.

그러나 이 긴 터널을 따라간다 해서 그것이 달관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실의 비루함에 좌절하며 터널 속에서 주저앉아 있지 않다. 이 터널 속에 놓여 있는 것이 내가 원한 삶은 아니지만, 동시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나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게 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물론 캄캄한 터널 속에서 벽을 더듬으며 한 발씩 나아가는 데 집중한다 해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눈 녹듯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미래의 어느 순간 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어둠의 본질과 대결해야 하는 순간은 찾아 올 것이다. 그러나 인촌이 그랬듯, 가슴에 무궁화를 품고 충실하게 살아온 오늘이 쌓이고 또 쌓인다면 그 대결의 순간에 승기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지난 110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본관의 돌들 위에 조그맣게 꽃을 피운 무궁화 조각을 바라보며 느낀 위로는 바로 이것이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너를 삼킬 듯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어둠에 흔들리지 말거라. 오직 뜻만 돈독히 세운다면, 그리고 그 뜻 속에서 좌고우면 하지 않고 네게 주어진 오늘을 산다면 이 터널의 끝에서 너는 다시 설 수 있으리라. 오늘도 본관 위에 놓인 작은 무궁화는 너른 고려대학교의 광장을 향해 꽃을 피우고 있다.

정경대 행정10 최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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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4 19:1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