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파산 지경에 이르렀는데, 대표이사가 자기 급여 명목으로 회사 돈을 다 챙겼어. 배임이 될까?” 대표님이 의뢰인과 오랜 회의 후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 다시 묻는다, “배임이 돼야 합니까, 안돼야 합니까?” 대표님이 “이 사람아”라며 껄껄 웃는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와 같은 영화를 보면, 변호사는 살인자를 무죄로 만들고, 사기꾼을 선량한 자로 꾸며내는 데 탁월한 것 같다. 진실을 의뢰인의 이익대로 꾸며주는 것, 그것이 변호사의 직업윤리처럼 묘사된다. 사무실에는 횡령, 배임, 뇌물수수 등의 먼지를 온 몸에 담뿍 뒤집어쓴 의뢰인들이 방문한다. 필자는 그 먼지를 털어드리기 위하여, 무슨 자료, 무슨 자료를 하루 걸러 요구한다. 그리고 그 자료들의 키가 컴퓨터 모니터만큼 높아지고 자료들에 필자의 손때가 묻어 눅눅해질 때쯤이면, 의뢰인은 무혐의의 세례를 받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필자가 단 한 단어라도 거짓 사실을 적시하는가 하면, 전혀 아니다.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열심히 자료를 찾아보고, 혐의가 사실이 아닐 수밖에 없는 사정을 객관적으로 정리해 보여드리는 것뿐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라는 말이 있다. 고소인을 대리할 때면 디테일에서 악마를 찾고, 피의자를 대리할 때면 디테일에서 천사를 찾을 뿐이다. 사실은 너무나도 여러 개므로, 배임이 되도록 하는 사실, 되지 않도록 하는 사실이 문제될 뿐이다.

강기훈이 유서대필을 하여 자살을 방조하였다는 사실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다가, 24년 만에 재심이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재심에서 법원이 무죄 판단을 한 주요 이유는 문서감정 결과 위 유서의 필적을 강기훈의 필적으로 볼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으로 보인다. 언론이 ‘한국판 드뤠피스 사건’이라 하면서 억울한 세월을 견딘 강기훈에게 무죄의 세례를 퍼붓고 있다. 하지만 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의 증거는 위 문서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수십 개의 자살 방조 정황이 있었을 것이고, 또 그 한편에 수십 개의 방조를 조각하는 정황이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자살 방조로 볼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였으므로, 무죄로 선고가 된 것이다.

얼마 전 한 드레스의 색깔이 파란색, 금색으로 보이는가, 흰색과 검정색으로 보이는가를 두고 전 세계적으로 논쟁이 일었다. 신기한 점은 필자의 경우, 처음에 봤을 때는 흰·검 조합으로 봤지만 술에 취해 봤을 때는 파·금으로 보였고, 다시 아침에 봤을 때 흰·검 조합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이를 단순히 흰·검이라 할 수 있을까? 피곤할 때는 파·금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건강한 신체로는 흰·검으로 보이는 드레스는 아닐까? 단순히 녹색 숲이 아니라, 오전에 빛이 동쪽에서 쏟아지면 노란색, 연두색, 오후에 해가 중앙에 떠있으면 녹색, 노을 질 무렵에는 주황색인 숲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실체적 진실’이라는 것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실체적 진실은 존재할 수가 있는 개념인 것인지, 대학 때 수없이 돌려보았던 영화 ‘라쇼몽’을 다시 보고 싶은 주말이다.

반승혜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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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8 08:2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