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나는 ‘고대신문 시사부장’이었다. 대학생으로서 아는 사회가 전부였던 당시, 나는 그 직책에 상당히 무겁고도 진지한 마음을 가졌더랬다. 시대와 사회가 마주한 문제에 분노하며 ‘심쿵’할 줄 아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캠퍼스 밖의 사회를 만나고 나니 우리 사회를 위한 문제에 ‘심쿵’할 여유 따윈 없었다. 비겁한 변명이겠지만, 회사에 치이고, 돈에 치이고, 미래는 불투명한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다 보면 개인적인 문제만으로도 ‘심쿵’할 일이 너무 많은 탓이다. 여기저기서 ‘심쿵’하고 다녔다면 아마 나의 심장은 서른 전에 기능을 다 했을지 모른다.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에 반발한 52년 만의 필리버스터. 8일간 192시간여에 걸친 릴레이 연설. 39명의 의원이 여기에 참여하며 캐나다의 58시간 기록을 거뜬히 갈아치웠다. 소설의 한 부분을 들려준 이도 있었고, 노래를 부르는 이도 있었고, 눈물로 야당의 지지를 호소한 이도 있었다. 솔직히 말해 이런 모습들은 한편의 유치한 정치쇼 같았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촌극 같았던 이번 필리버스터는 나를 오랜만에 ‘심쿵’하게 했다. 결국, 독소조항은 그대로 통과됐지만 말이다.

처음 필리버스터를 보며 ‘그래, 이 정도면 국회의원 월급으로 나가는 내 세금이 덜 아깝네’하는 밥벌이에 관한 생각을 했다. 다음에는 국회 본회의장을 찾은 사람이 4000여 명에 달한다는 뉴스에,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치부됐던 젊은 층의 반응이 뜨겁다는 뉴스에, 나는 ‘우리나라 정치도 가망이 있을지 몰라’하며 남몰래 ‘심쿵’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번 필리버스터에서 가장 ‘심쿵’했던 부분은 단연 박근혜 대통령의 등장이었다. 박 대통령은 필리버스터의 핵심 쟁점인 테러방지법을 비롯해 노동개혁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등을 통과시키지 않는 국회를 20분간 10여 차례 책상을 ‘쿵쿵’ 내리치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비판의 중심 논리는 언제나 그렇듯 ‘경제 살리기’였다. 수없이 봐왔던 클리쉐(Cliché)였지만 나의 심장은 그녀가 친 책상의 반동보다 더 크게 쿵쿵댔다.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테러 참사에 기해 ‘테러 방지’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씌운 테러방지법의 주요 쟁점은 국정원이 테러를 일으키고자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개인을 선별해 통신을 감청하고, 계좌를 추적할 수 있다는 부분이다. 21세기에, 그것도 자유민주주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빨리 통과시키라 윽박지르는 박 대통령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유신시대를 연상시킨다. 경제성장과 평화통일을 위해 정치 안정을 강조하며, 정부에 반하는 것으로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무고한 사람을 감시하고 고문했던 그 아버지처럼 말이다.

30여 년 전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으로 투쟁해 수호한 민주주의를, 경제를 살리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나라는 국가의 기능을 못하는 나라가 아닌가. 그렇게 개인을 무시하고 성장만을 바라보며 발전해온 경제가 현재 어떤 고통을 안겨주었는지는 지금 세대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국정원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진 않을까 ‘심쿵’한다. 다시 생각하니 이게 가장 ‘심쿵’할 일이다.

숲


* 냉전(冷箭)은 숨어서 쏘는 화살이란 뜻으로, 고대신문 동인이 쓰는 칼럼 코너입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8 08:5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