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쿳시, 󰡔추락󰡕, 왕은철 역, 동아일보사, 2004.

누구의, 무엇의 ‘추락’인가

김홍경 (자유기고가)

존 쿳시의 소설 󰡔추락󰡕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삼는다. 백인 대학 교수인 루리와 유색인 학생 멜라니 사이의 갈등이 이 소설의 주요 스토리 라인이다. 이 소설은 멜라니와 루리의 관계를 그 절반 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전적으로 루리의 시선과 생각으로 진행되는 서술에서 멜라니의 생각이나 상황 등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리는 멜라니를 강간했다는 혐의로 대학에서 해직된다. 루리는 자신의 ‘단순한 섹스’가 성폭력으로 규정되는 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작품의 말미까지도 자신이 멜라니를 성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가해자

루리에게 숱한 여자들과의 섹스는 자신을 “풍부”하게 만드는 경험이며 자신이 합당하게 취할 수 있는 무엇이다. 그는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자신의 행동이 원초적인 욕망에 의해서 발생한 것일 뿐이라고 자기변호를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의 섹스를 그녀가 “그래야 하”는 것으로 강제할 만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한다. 그는 그 일을 “욕망의 권리”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욕망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 자신의 힘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멜라니와의 섹스는 교수와 학생의 신분이 사라진 ‘순수한 욕망’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것을 공적으로 재단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사건의 본질은 엄연한 교수/학생의 권력관계에 있다. 루리는 이 점을 끝까지 부정한다. 그의 욕망과 낭만이 상대에게는 불쾌한 치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그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에로스의 노예”라고 밝혔듯이, 그는 이 강제적인 섹스가 하나의 에로스적 격정과 환영의 실재라고 인식한다. 그의 행동이 “아프로디테의 화살통에서 나온 것”이라는 진술 속에서 멜라니의 목소리는 소거된다. 흥미로운 점은 루리가 멜라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는데 전적으로 실패했다는 데 있다. 그에게 멜라니는 자신의 에로스를 실현할 보조도구이자 대상일 뿐이지, 무언가를 생각하고 느끼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다. 그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멜라니는 ‘열 두 살짜리의 엉덩이와 작은 가슴과 납작한 배’를 가진 어린 여자일 뿐이다. 그는 멜라니의 입장이 되어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려고 하지 않고 이 ‘불편함’을 타개하는 데에만 골몰한다.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그는 자신의 유죄는 인정하지만 반성하지는 않으리라는 태도를 보인다.

여성/비백인에 대한 폭력의 ‘가벼움’

루리는 멜라니의 부모에게 가서 사과한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과 멜라니의 성적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서정적인 어떤 것”이 자신에게 부족했다고 말하면서 끝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단지 섹스의 방식이 거칠었다는 점을 지적할 뿐이다. 멜라니의 집을 찾아가는 것 또한 진정한 사죄의 태도나 화해의 몸짓이라고 보여지지 않고 그녀에 대한 하나의 집착이나 관음증이라고 판단된다. 그녀의 공연을 보러 가서 자부심을 느끼며, “내 것이야!”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그의 모습은 그러한 의심을 더 짙게 한다.

일의 맥락에 어두우며, 타인을 이해하고자 노력하지조차 않는 루리가 커뮤니케이션학과의 교수로 설정된 상황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성매매 여성이라는 신분이 밝혀질 경우 큰 위험에 빠지게 될 소라야의 실명을 알아내 전화하는 모습이나, 기습적으로 멜라니의 집에 침입하여 강제적인 섹스를 시도하는 모습은 충분히 폭력적이다. 멜라니와 소라야가 ‘비백인’으로 설정된 것은 루리가 가장 사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는 섹스조차 그들의 인종차별 역사 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소설의 곳곳에는 루리의 인종차별적인 발상이 드러난다. 비백인 페트루스에 대한 그의 분노에는 그를 ‘예전처럼’ 다룰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배어있으며, 페트루스의 결혼 제안을 들으면서 ‘우리 서양인들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아니다’고 말할 뻔 한다. 그에게 추락이란 아프리카에 사는 백인으로서 ‘마땅히 거저 얻어야 할 것들(땅, 섹스)’을 잃어가고 빼앗기는 일의 수치스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