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영화’라는 범주에 기대지 않으면서 여성영화에 대한 사유를 지속할 수 있을까.

무엇이 ‘여성영화’인가

남다은(영화평론가)

구체적인 개별 영화들을 하나의 틀 안에서 범주화할 때, 우리는 그 범주의 테두리가 한 영화를 구성하는 미세한 층위들을 얼마나 포괄할 수 있을지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예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날 ‘여성영화’라는 범주가 당면한 궁지가 그런 것 같다. ‘여성영화’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마주하고 우리는 물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공포나 멜로, 혹은 스릴러와 같은 장르일까. 장르보다 상위에 있는 어떤 범주일까. 어떤 실천적 행위로서 여성운동 자체일까. 페미니즘을 조금이라도 접해본 사람이라면, 이렇게 정의를 내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영화는 남성의 시각적 쾌락의 대상에서 벗어나 여성이 응시와 재현의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영화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 앞에서 또 다른 질문이 고개를 든다. 쾌락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응시와 재현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왜 정치적으로 옳거나 옳지 않은가. 보다 과격하게 나아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한 편의 영화를 본 다음, 그것이 여성영화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과연 필요한 일일까.

물론 여성인물들이 남자 주인공, 남자 관객들의 시선 안에서 수동적인 스펙터클로, 스스로를 언어화하지 못하는 존재로 재현 되어온 역사는 깊다. 영화가 곧 남성 중심적인 세계관, 미학, 제도와 동의어나 다름없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1970년대 서구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남성의 시점과 그 시점에 동일시하는 남성 관객이 여성을 어떤 식으로 시각적 쾌락의 대상으로 구성하는지, 여성 관객은 이런 영화들 앞에서 어떤 위치를 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때, ‘여성영화’라는 담론은 주류영화의 관습에 대항하는 여성운동의 일환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40여년이 흐른 오늘날, 그 시절의 맥락을 그대로 끌고 와서 전지구적 자본주의 하에서 다양한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의 삶을 사는 여성들의 영화를 ‘여성영화’라는 보편의 범주로 묶는 것이 여전히 저항성을 가진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범주는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구태의연하게 묶어 버리는 죽은 용어로 기능하지는 않는가.

이론적 논의를 떠나, 일반적으로 ‘여성영화’라고 칭해지는 영화들은 여성감독이 만들고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으며 여성관객이 향유한다는 조건을 공유한다. 많은 비평가들도, 영화제도, 일반관객들도 그 용어를 그렇게 사용해오고 있다. 하지만 이 조건들의 조합이 실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는 구체적인 영화들의 예만 들어도 금세 알 수 있다. 요컨대, 프롤레타리아 여성 두 명이 부르주아 가정을 폭파하는 은 감독 클로드 샤브롤이 남자이기 때문에 여성영화가 아닌가? 게이들의 비극적인 사랑을 담은 이송희일의 는 이 영화의 향유자 대부분이 여자들임에도 감독이 게이이므로 여성영화가 아닌가? 여성을 중심 캐릭터로 삼고 여성의 욕망을 다루는 멜로물이 결국 성역할의 재확인으로 결론 맺는다면, 이를 여성영화로 부를 것인가? 즉 여성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건 감독의 성별, 관객의 성별, 심지어 주인공의 성별과 같은 표면적으로 고정된 조건이 아닐지도 모른다. 대신 우리는 이제 그 조건들을 초월하기도 하고 포괄하기도 하는 다른 무엇, ‘여성적인 시선’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여성적인 시선’ 역시 한마디로 정리하기엔 모호하고 불가능하다. ‘여성적인 것’과 ‘여성주의적인 것’의 경계, 섹스와 젠더에 대한 복잡한 논의들, 재현될 수 없는 영역을 재현해야하는 딜레마 등 수많은 사유들을 거치고 상반된 논의들을 오가도 하나의 명징한 답을 얻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여성영화’라는 영역이 미리 범주를 상정해서 개별 영화들을 거기 맞춰 판단하는 고정된 전제가 아니며, 영화 한편 안에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여성적인 시선’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적’이라는 말로 수렴되는 모든 폐쇄된 테두리를 수많은 결들로 파열하며 자기갱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 많은 욕망의 창들을 여는 것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가 테레사 드 로레티스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방식보다는 다른 사회적 주체를 위한 재현 가능성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방식”의 중요성을 말할 때, 그녀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여성을 욕망의 대상에서 주체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싸워온 이유는 단지 지배의 자리를 선점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 주체와 타자의 경계에 생긴 균열지점에서 세계를 감각하는 새로운 욕망이 열릴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여성영화’라는 용어, 영역, 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건 실은 여성영화가 아니라 구체적인 영화, 여성일반이 아니라 개별여성의 삶에서 시작할 수 있을 때이다. 나아가 ‘여성영화’라는 틀을 지키기 위해 애쓸 때가 아니라 그 틀이 부서지는 순간들을 즐겁게 응시할 수 있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