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경준(대중음악평론가)

일상과 이상의 틈

일상의 비루한 사막에서 꿈마저 없다면 그곳은 지옥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꿈을 꾸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것. 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소망이 얼마나 신기루 같은 것이었는지,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자본의 교환법칙과 논리학을 익히기 전, 그러니까 흔히 ‘순수의 시대’라고 표현하곤 하는 어린 시절. 내 소박한 희망이 거대한 중력으로 자신을 짓누르는 수레바퀴 아래에서 자근자근 부서지게 될 줄은 그때는 예견하지 못했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인생이라는 이름의 이 작은 희비극을 예리하고 냉철하게 그려낸 작품이라 할 만하다.

여기 밴드가 있다. 밴드의 이름은 와이키키 브라더스다. 그들은 하와이의 아름다운 해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와이키키’ 호텔에서 연주하는 3류 그룹이다. 그들에게도 한때 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스쿨밴드로 활동하던 그때 그들은 음악을 위해 청춘을 바치기로 맹세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과 세상의 힘은 모든 것을 뒤바꿔놓았다. 그룹의 리더인 성우(이얼)가 한참 만에 고향을 찾아 친구들과 재회한 후 부르던 송골매의 ‘세상만사’ 가사를 보면 이상과 일상 사이의 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멀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뜻대로야 되겠소만/ 그런대로 한 세상/ 이러구러 살아가오.” 노래는 삶을 즐기기보다 책임져야 하는 나이로 성장한 청춘들의 달콤 쌉사름한 페이소스를 무심하게 전달한다.

그 많았던 음악은 다 누가 가져갔나

성우가 동경하고 사모했던 꽃다운 소녀 인희(오지혜)의 삶을 보자. 1980년대를 풍미했던 여성 로커 조안 제트의 ‘I Love Rock N’ Roll’을 부르던 천방지축 아가씨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남편을 잃은 배추장사로 전락해 있다. 시간을 건너 뛴 그녀의 쇠한 외양은 “꿈은 꿈대로 남겨두라”는 어느 대중가수의 일갈을 떠올리게 한다. 그뿐이랴. 그 옛날 성우의 음악학원 원장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미 헨드릭스를 동경하던 양반은 이제 알코올에 의존한 채 하루하루를 소진하며 폐인과도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에게 삶이란 지긋지긋함을 넘어선 ‘잉여’에 다름 아니다. 이제 그들은 질문할 용기조차 나지 않는다. 바닷가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뛰놀던, 그 낭만과 정서는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그 많았던 음악은 다 누가 가져갔을까?

누군가는 성우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 하고 싶은 일 하니까 행복하니?” 어쩌면 이것은 정곡을 찌른 질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들과는 달라. 난 내가 선택한 길을 걷고 있어. 세파에 찌든 너희와는 본질적으로 같지 않아. 허나 사실 이런 변명은 틀렸다. 이런 류의 독백이 거짓인 이유는 만일 실제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면 굳이 이런 항변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랬듯, 성우도 자기기만의 가면을 쓰고 지내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단란주점 취객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옷을 벗는 장면은, 꿈을 택했다고 믿었던 사람이나 꿈을 버렸다고 여겼던 사람이나 모두 똑같은 회로 속을 달려가고 있는 것이라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배경을 타고 흐르는 옥슨80의 ‘불놀이야’, 산타나의 ‘Europa’, 함중아의 ‘내게도 사랑이’는 결코 1류가 될 수 없는 비주류들의 아름다웠던 ‘한때’를 훑으며, 파도의 포말처럼 하얗게 사라져간다.

그러니 승자는 누구인가? 성우도 친구들도 자신의 손을 들어올리기 힘들다. 성우는 신념이 역사를 변화시키지 못함을 깨달았을 것이고, 앞만 보며 살아왔던 실용주의자 친구들도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회전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모두가 패배했다는 것이다. 혹은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 숭엄한 진리는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투쟁 이래 인류사에 법칙처럼 누적되어왔던 명제인데, 영화는 패배주의를 암시하는 것으로 문을 닫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다. 결국 그렇게 되면, 섣부른 염세적 세계관을 정당화하는 결론밖에는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헤르타 뮐러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세상의 거대한 꿩”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꿩은 도처에 포진한 포수의 총부리를 뚫고 먹이를 찾고, 새끼들을 부양한다. 이게 위대하지 않다면 뭐가 위대하겠는가. 마침내 영화는 이 작은 일상을 위무하고 긍정한다.

어떻게는 우리는 살아가니까

영화의 라스트신, 성우가 연주하고 인희는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를 노래한다. 채소를 팔던 아낙이 곱게 무대의상을 차려입고, 고혹적인 목소리로 ‘인생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복잡한 감정을 갖게 만든다. 이것이 환상인지 진실인지는 명확치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일상에 지칠지라도, 함몰되지 말고 끝까지 자신을 잃지 말라”는 조언이다. 이 장면은 진정 고귀한 것은 “당신의 눈앞에” 있음을 인희의 노래를 통해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다. 끝없이 타인과 나를 저울질하고 분노하고 자학하기보다는, 삶을 받아들이고 긍정함을 통해 만족을 찾는 것. 그 순간, 결코 심수봉이 될 수 없는 30대 아줌마도 작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영화는 섣부르게 탈출구를 찾으려거나, 값싼 감동의 코드를 주입하지 않는다. 이 장면이 빼어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울리는 ‘사랑밖에 난 몰라’는 음악이 수천 년 동안 인류와 함께 해왔던 증거를 준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가 본인의 삶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말할 자 누구일까. 노래가 보편적이 될 수 있는 이유가 그에 있으니,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조언해주는 것만 같다. 내일이면 다시 힘에 부친 하루가 돌아오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음악이 내 곁에 머무니, 세상에서 친구 하나 얻었다는 것은 축복이다. 당신의 삶에 툭, 떨어진 작은 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