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빌어먹으며 공부하고 싶은 이유

어느 대학원생

가축 살처분에 참여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에 시달린다는 기사를 보며 나는 위안을 얻는다. 내가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 했던 이유는 내가 악하고 냉정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아직 그들을 눈앞에서 보지 못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왕이 제사의식에 끌려가는 소가 불쌍해 대신 양으로 제물을 바꾸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는, 이런 생각의 끝이 어떤 위선으로 귀결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준다. 다만 파렴치한 금수보다는 위선적인 바보에서 시작하는 것이 보다 나아갈 수 있는 쪽일 것 같다.

나는 미투 운동이 사적 처벌의 위험을 가지고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피의자가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증거가 불충분할 경우,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는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 10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1명의 무고한 사람을 벌하지 않는다는 정신도 존중할 만하다. 범인을 놓치거나 무고한 자를 처벌하는 것은 모두 법의 틈새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사회적 안전망의 틈새에 노출된 이들이 극도의 불안을 호소하는 것은 당연하다. 법이 더 이상 우리 삶의 가장 크고 튼튼한 타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 할 때 인간은 불안을 느낀다. 라캉에 따르면 불안은 유일하게 속이지 않는 정동이다. 불안이 호소하는 그 것, 불안이 속이지 않고 보여준 그 날은 안타깝게도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특히 법과 같은 제도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우리 앞에 ‘결여’의 건재함을 증명한다. 타자가 결여되어 있는 한에서 욕망할 수 있다는 말은, 무너지는 순간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투 운동은 학문 하는 사람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제기한다. 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미묘한데, ‘시선 강간’의 담론 속에서 성은 육체의 외피와도 같다. 시선의 폭력 속에서 상처받는 것은 우리의 육체가 아니다. 외부 대상의 침입을 막아야할 최전선에 가장 침입되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 가장 연약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할 무언가가 위치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남성이 여성을 대상화하고 시선을 통해 폭력을 가한다는 말도 물론 타당한 분석이지만 우리의 육체가 더 이상 상징적인 질서 속에서 자신의 적합한 외피, 보호막을 찾지 못 하고 있다는 측면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육체와 성이라는 단어에 주체적인 삶을 견인하는 상징을 채워 넣는 학문적 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대학원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대학원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사태의 본질에 다가가는 고난을 부여하면서도 그 고난을 이겨낼 힘을 주는 상징적 자본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의식주가 비단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대학원은 상징 자본의 생산 기관 중 하나로서 최소한의 역할을 해내야만 한다. 그런데 상징적 자본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오늘날 과연 우리는 성에 대해 덜 말하고 적게 말했는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을 자유롭게 고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만드는 옷이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 활자 생산물은 기술적으로 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의 가능성을 지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몸을 담구고 있는 학자는 생계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문학 시장의 참담한 현실과 회화 시장의 기형적 성장은 문자 예술과 논문의 물질적 토대의 유사함 때문인지 우리에게 앞으로 사멸 아니면 복종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지만이 있을 뿐이라는 절망감을 불러온다. 움푹 파인 아우라의 굴곡을 따라 돈이 모인다면, 생산물이 공공재의 성격을 더욱 많이 가질수록 자본주의는 저자의 아우라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스타 숭배와 작가 숭배는 그래서 위험하다. 자본주의적 질서가 거의 파탄이 난 대학원은 자본 철폐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여러 철학자들의 이상적 세계와 언뜻 닮아 보인다. 하지만 이곳은 자본이 철폐된 청정 구역이 아니라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우주 공간과 같다. 청정 구역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세한 곳곳이 숨 쉬고 수많은 생물들이 태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상징적 자본은 희귀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판매하는 신약이라기보다는 일상을 채우고 있어야할 생필품에 가깝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

대학원이란 곳은 이상하다. 이상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상의 하모니가 들리는 가장 가까운 곳일지언정 이상이 실현되는 곳은 아니다. 학부의 성적 제도가 절대 평가로 바뀌었을 때의 당혹감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대학의 평가 제도를 바꾸기 위해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했는가. 한 명의 총장으로 인해 바뀐 절대 평가 제도는 아직까지 어떤 큰 문제없이 유지되고 있다.

동유럽의 어느 국가는 독립일을 기념해 잠자는 숲 속의 공주와 같은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매년 상연한다고 한다. 수동적인 여성이 어느 남성에 의해 구출 받는 이야기가 뭐가 그리 아름다울까. 구원의 순간을 회상하며 박탈당한 자유를 애도하고 사건을 온전히 기쁨으로만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연극 속의 공주가 되는 훈련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운동의 끝에 다시 또 누군가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그것은 달콤하고, 확실하다. 잠에서 깨어남으로써 역설적으로 영원히 잠들어 있기를 택한 공주가 될 것인가. 그런데 또 다른 측면, 누군가를 구원해야만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무언가를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 공부하는 사람, 아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 끝내 아는 대로 사라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