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
- 손보미, 『디어 랄프 로렌』, 문학동네, 2017.
한영인(문학평론가)
자신의 첫 번째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문학동네, 2013)의 ‘작가의 말’에서 손보미는 “「과학자의 사랑」과 「그들에게 린디합을」은 내가 가장 자신 있는 형식으로 쓴 소설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두 작품은 작품 내에 다양한 장르의 텍스트들을 인용, 배치하고 그걸 소설적 사료(史料)로 삼아 서사를 구축해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들에게 린디합을」에서는 영화와 잡지 등이 정확한 출처를 가장하며 등장하고 「과학자의 사랑」은 서두에 이 소설이 한 잡지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임을 알리면서 명시적인 액자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소설들에 등장하는 영화, 잡지, 책 등의 다양한 텍스트는 모두 허구의 것이다. 하지만 그 핍진함은 두드러지는 것이어서 우리는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허구 속 허구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드는 기이한 경험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설가로서 손보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창작의 형식이란 ‘진짜 같은 가짜’로부터 시작해서, 혹은 그걸 활용해서 ‘가짜 같은 진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앞서 인용한 ‘작가의 말’ 뒤엔 바로 이런 문장이 뒤따른다. “앞으로 이런 형식의 소설을 더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로부터 4년 후, 손보미는 『디어 랄프 로렌』을 펴냈다. 그녀의 회의와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방식으로 또 하나의 ‘가짜 같은 진짜’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소설은 뉴욕대학교 물리학과 대학원에서 쫒겨난 종수가 학창시절 수영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랄프 로렌에 대한 자료 수집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서사와 랄프로렌(티모시 스펜서)과 조셉 프랭클의 관계를 둘러싼 비밀에 집중하는 또 하나의 서사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자네 실력이 나쁘다는 게 아니야. 자네는 잘 했어. 단지 여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뿐이야.”라는 지도교수의 한마디에 학교를 그만두게 된 종수는 이후 지독한 내적 방황을 겪는다. 집에 처박혀 두문불출하던 종수는 이사를 위해 짐을 정리하다가 예전에 수영이 보냈던 청첩장을 우연히 발견하고 이후 그녀와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보내야 한다며 무작정 도움을 청하는 수영을 종수는 기꺼이 도와주었던 것이다.
수영이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하는 이유는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손목시계. 그래야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랄프 로렌으로 걸칠 수 있는 거란 말이야.” 하지만 절대 시계를 만들지 말라는 랄프 로렌의 유언 때문에 랄프 로렌에서는 시계를 만들지 않는다.(물론 랄프 로렌은 아직 살아 있으며 따라서 그런 유언은 당연히 허구다.) 종수는 우연히 수영의 청첩장을 발견하고 랄프 로렌에 대한 편집증적인 궁금증에 사로잡힌다.
이후 그는 잡지와 신문, 책 등을 뒤져가며 랄프 로렌에 관련된 거의 모든 기사를 찾아 읽는다. 여기에는 『보그』와 같은 잡지 기사, 『뉴욕헤럴드트리뷴』에 실린 신문 기사는 물론이고 앤 라이스의 『새로운 세계의 창조자, 랄프 로렌』, “캐슬른 오브라이언의 『짧은 기록들 :진짜와 가짜』, 조지 캠밸의 『합리적인 숭고』와 같은 단행본도 포함되는데 이는 랄프 로렌의 행적을 담고 있는 모두 허구의 가공된 텍스트들이다. 손보미는 이 다채로운 허구의 조각들을 직조해 랄프 로렌과 조셉 프랭클이라는 인물 사이의 이야기를 창조해낸다.
서사의 실마리는 절대 시계를 만들지 말라고 한 랄프 로렌의 유언이다. 종수는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매달린다. 그 유언이 없었다면 수영의 컬렉션은 완성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종수는 수영과 어울리는 일 역시 없었을 것이며 성적이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결과 미국 유학을 택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종수는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긴 사연을 몇 마디 문장으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홀린 듯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절대 시계를 만들지 말라고 한 티모시 스페서(랄프 로렌)의 복잡한 마음 근처에 당도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분명한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어렴풋한 암시에 가까운데 이와 같은 어렴풋함은 랄프 로렌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타인의 말과 텍스트 더미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제시하는 특유의 방법을 통해 획득된다.
소설은 허구다. 아무도 그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허구의 글뭉치를 통해 어떻게 진실에 도달하게 되는가? 이는 소설의 해석과 작용을 둘러싼 오래된 난제 중의 하나다. 애초에 자신의 허구성을 천명한 뒤 그 간극에 주목하는 입장도 있고 리얼리즘처럼 재현과 모사의 치밀함과 합당성에 주목하는 입장도 있다. 하지만 손보미는 ‘허구화된 리얼’ 혹은 ‘리얼한 허구’를 통해 사실과 진실의 경계를 급진적으로 되묻는다. 그녀가 창조하는 새로운 ‘리얼’의 감각이 매혹적인 이유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19 17:36: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