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와 유신의 종말

지난 1월 발간된 『문화/과학』 제89호의 특집 주제는 ‘블랙리스트’이다. 이번 특집에 글을 실은 필자들은 블랙리스트의 작동 기제, 혹은 그 기원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이들이 보기에 블랙리스트는 “비단 예술인들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빈민, 학술연구자, 진보적 정당 정치인의 신체에 찍힌 유신정치의 낙인”이다. 그리고 각 글의 결론에서 필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형식적인 정권교체만이 아니라, 블랙리스트로 표상되는 유신정치 그 자체의 폐기를 지향하고 이루어낼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블랙리스트의 시간과 세 가지 동맹체

이동연의 ｢블랙리스트와 유신의 종말｣은 이번 특집의 총론에 해당되는 글이다. 이동연이 보기에 박근혜 정권이 내세운 ‘문화융성’은 블랙리스트를 은폐하기 위한 위장술이다. 또한 이 위장술은 공포의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블랙리스트는 현재의 문화현실, 문화융성 정책의 야만적 실체, 그리고 통치자의 정신병리적 상태를 분석할 수 있는 기호이다. 이 글에서 이동연은 바로 그 기호를 이해하기 위해 ‘블랙리스트의 시간’을 계열화하고, 또 그 전달 체계를 분석했다.

이동연이 말하는 ‘블랙리스트의 시간’이란 통치의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던 블랙리스트가 의식의 영역으로 노출된 순간, 혹은 문화적 공포감이 현실화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사건의 시간이 개입되는데, 첫째는 세월호 재난의 시간이고, 둘째는 예술 검열의 시간이며, 셋째는 비선실세의 시간이다. 우선 세월호 재난의 시간은 예술 검열의 시간을 앞당기고 심화시켰다. 세월호 재난과 이어진 문화예술인들의 저항은 공안 주체들의 공포를 추동하고 예술 검열의 시간을 앞당겼다. 그리고 이 과정에 미르 재단 등을 통해 사익 추구뿐 아니라 ‘좌파척결’이라는 장기적 목적을 달성하려 한 비선실세의 시간이 개입된다. 즉 세월호 재난이 유신문화의 회귀를 앞당겼다면, 비선실세의 시간은 문화권력의 사유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블랙리스트의 책임이 박근혜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리스트의 작성, 전달, 수행은 ‘집단적 공모의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동연은 블랙리스트의 전달체계가 세 가지 위계적 동맹체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첫 번째는 ‘사교-유신 동맹체’이다. 일견 서로 조우할 근거가 희박해 보이는 주술정치와 공안정치는 박근혜를 매개로 동맹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들은 블랙리스트를 박정희의 혼령을 위한 축문이자 공안을 위한 살생부로 인식한다. 두 번째는 ‘정치-관료 동맹체’이다. 이들은 블랙리스트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정무적 실무 기획을 주도한다. 첫 번째 동맹체가 유신이란 영혼을 지키려 한다면, 조윤선, 모철민 등으로 대표되는 두 번째 동맹체는 유신에 영혼을 판다. 세 번째는 ‘지식-권력 동맹체’이다. 김종, 김종덕 등으로 대표되는 이 동맹체의 구성원들은 미션을 전달받고 현장에서 수행하는 책임자들이다. 세 동맹체는 위로부터의 권력 행사와 아래로부터의 권력욕을 서로 교환하며 각자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킨다.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히스테리는 “자의식의 과잉과 자기 정당성의 부재” 사이의 모순에서 오는 신경증이다. 또한 히스테리가 기억에 기초한 심리적 방어기제라는 점에서 블랙리스트라는 ‘히스테리’는 역사적 유산을 갖는 것이다. 그 유산은 유신의 ‘검열’로, 블랙리스트는 그러한 유신의 히스테리가 전이된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블랙리스트는 유신 종말의 징표가 될 수 있더라도, 블랙리스트 없는 사회를 자명하게 보장하지는 않는다. 블랙리스트는 언제든 전이되어 회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검열’에서 벗어나 ‘나만의 노래’를 온전히 듣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유신의 역사적 유산에 죽음을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동연은 이를 위한 과업 중 하나로 세월호 재난의 진상규명, 그리고 그것의 진정한 애도를 예로 들면서 논의를 마치고 있다.

‘공공성’을 내세운 검열과 관료제, 그리고 ‘조기경보체계’로서의 예술

강정석의 ｢블랙리스트와 예술검열 실태 분석: MB정부에서 박근혜까지｣는 지난 10년간의 예술 검열 사례들을 통시적으로 분석했다. 강정석이 보기에 최근 폭로된 블랙리스트는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좌파 척결 전략’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2012년 이상호 기자가 밝혔던 것처럼 이명박 정부는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이라는 이름 아래 ‘문화계 좌파 적출’을 시도했다. 잘 알려져 있듯 이는 〈표적 감사→기관장 해임 또는 사퇴 종용→친정부 인사로 물갈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표적’을 선정하는 기준을 제시한 것이 ‘문화미래포럼’의 ‘문화예술계 현안과 과제’라는 문건이다. 해당 문건에서 좌파로 지목된 이들은 모두 주요 기관장 자리에서 사퇴했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코드인사’들이었다.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작성 역시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의 연장선에 있는 것인데, 두 가지 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그것과 다르다. 하나는 특검이 밝혔듯 블랙리스트가 “선거 국면에서 유리한 구도를 차지하기 위한 여론조작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정부출연기관의 기관장들에 대한 검열에 집중한 이명박 정부와 달리 이번 블랙리스트는 국가보조금 지원 등을 무기로 특정 예술가나 예술인 단체를 겁박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공개된 블랙리스트는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보수우익 세력의 영구집권 플랜을 보여준다는 것이 강정석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번 블랙리스트의 기묘한 점은, 체계적이지 못한 기준으로 인해 적용 대상이 지나치게 광범위해진 데 비해 그 관리와 적용은 매우 철저했다는 점이다. 즉 블랙리스트는 선정과정의 비체계성과 관리 및 적용의 체계성이 합쳐진 이상한 구조로 작동했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관료제’이다. 바우만이 지적했듯, 현대의 특수한 발명품인 관료제는 두 가지 특성을 갖는다. 하나는 “꼼꼼한 기능적 분업”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책임성의 기술적 책임성으로의 대체”이다. ‘기능적 분업’이란 위계질서 안에서 분화된 업무만을 담당하는 관료들이 자기 작업의 ‘최종적 산물’로부터 ‘실제적·정신적 거리’를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거리감은 도덕적 책임을 분산시키고, 오로지 자기 업무에 대한 ‘기술적 책임감’만을 강조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명박 정부의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이나 김기춘 등이 사용한 ‘문화예술계 공공성 강화작업’ 등의 용어가 관료들을 움직이는 “행정적인 언어”의 단적인 예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조윤선 등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이러한 ‘관료제적 구조’를 문제 삼아야 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여전히 “용기 있는 개인들의 연합된 행동”이다. 또한 마샬 맥루한이 강조한 예술가의 ‘조기경보체계’ 역할은 본래적으로 예술가들에 고유한 삶의 목적이기도 하다.

검열의 계보학

천정환은 ｢현대 한국 검열의 계보학: 박정희 정권 시기의 검열과 문예진흥정책을 중심으로｣에서 한국문화에 검열이 내재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고찰했다. 천정환에 따르면 신문지법·출판법(1907-08) 이래 검열이 중지된 적은 없으며, 검열을 빼고는 한국의 지성사, 근대 문예사나 독서 문화사 등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천정환은 통치기구나 사법기관을 넘어 자본과 문화매개자들(Cultural Intermediary), 그리고 작가들의 ‘동료검열’과 ‘자기검열’까지 종합적으로 고찰할 때에만 ‘검열’의 작동기제와 역사를 이해할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천정환이 위의 한 사례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 유신시대의 검열 기제이다. 그에 따르면 이 시기 검열은 크게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국가보안법을 중핵으로 하는 검열법, 이 법을 수행하는 문화부,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검경 및 중앙정보부 등의 폭압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 주도 및 관변 민간기구를 통한 ‘문예진흥’ 사업이다. 우선 통치를 전쟁의 일부로 간주했던 박정희 정권의 입장에서 ‘문화’는 심리전의 영역이다. 박정희 정권이 심리전의 무기로 삼은 것은 쿠데타 직후 개정한 ‘외국 (정기) 간행물 수입 배포에 관한 법률’과 “저질적이고 퇴폐적인 출판물을 강력하게 규제”하기 위해 유신 시절 개정한 출판법 등이었다. 한편 유신정권은 문예진흥원(1973), 문예진흥5개년계획 등 ‘문예진흥’ 정책을 펴기도 했다. 이는 기발한 방식의 검열인데, 자금 지원을 빌미로 사전 검열을 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이 사용한 ‘채찍’과 ‘당근’은 자본을 통해 ‘민간검열’의 맥락을 형성하기도 했다. 법 조항을 통해서든, 혹은 자금 지원을 통해서든 국가의 검열은 문화 상품을 통해 수입을 기대하는 자본에 타격을 입힌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수익 구조뿐 아니라 인신 구속, 고문을 통해 신체 자체에도 상해를 입힌다. 이에 자본(가)은 검열을 내재화하여 손해를 줄일 수밖에 없는데, 이는 최근 CJ의 예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한편 극악한 정치권력에 의한 검열의 최고 단계는 ‘자발적 금지’, 즉 ‘자기검열’이다. 자기검열은 ‘말할 수 있음’이라는 주체의 성립 조건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주체와 ‘대타자’인 국가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하며, 다양한 “정치적 서발턴”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두 개의 대타자가 존재하는 한반도에서 국가와 관계 맺는 것은 목숨을 저울질하는 것과 같다. 이에 많은 문필가·예술가들은 ‘참여’ 대신 ‘탈정치’를 택했던 것이고, ‘가치중립’의 지대나 ‘순수예술’ 등의 언표는 좋은 도피처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자기검열은 지극히 ‘한국적인’ 지식인과 문화 풍토를 만들었으며,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자유실천문인협회’처럼 소수의 양심적 지식인과 문화인들의 반대운동 역시 존재했고, 이 또한 광화문 광장의 블랙텐트와 문화예술인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천정환은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지금의 검열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노동자의 책〉 이진영 대표 구속 사건과 블랙리스트를 들었다. 이 대표 구속 사건은 ‘민주화’를 통해 거의 해체되었다고 믿어온 검열법 체계가 다시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고, 블랙리스트는 자생성이 거의 상실된 문화계를 ‘자금 지원’을 무기로 흔드는 ‘문예진흥’ 계열의 검열을 보여주는 예이다. 글의 말미에서 천정환은 정부나 기업의 자금 지원을 외면하기 힘든 문화·예술계의 구조적 취약성을 해결하기 위한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문화융성정책과 블랙리스트

박소현의 ｢박근혜 정부 문화융성정책의 실체와 문제점｣은 블랙리스트의 “허무한 짝패”이면서 ‘정책적 결정’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박근혜 정부의 문화융성정책을 분석했다. 박소현에 따르면 대통령 취임사에서부터 ‘문화융성’을 내세운 박근혜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문화’를 국정기조로 삼은 최초의 정부였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제시된 공약에서도, 법정기구인 인수위원회의 활동 결과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문화융성’은 다분히 즉흥적으로 출현한 용어였다.

‘문화융성’은 법정기구의 활동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출현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지만 그보다 주목할 점은 그 ‘말씀’이 주무부처 차원에서 사후적 생명과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2013년 업무계획과 ｢문화기본법｣의 면면을 통해 알 수 있듯, 문체부는 실무 차원에서 문화 분야에 대한 지원 정당성을 법률적으로 확보함과 동시에 문체부라는 행정조직의 존립 근거를 강화하고 업무영역을 확대하고자 했다. ｢문화기본법｣은 절반 이상이 서로 상충하는 해석의 여지가 있는 추상적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로 인해 법률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근거조항들은 상당 부분 국무회의에서 의결되는 대통령령(시행령)과 주무부처 장관이 결재하는 시행규칙에 위임되었다. 즉, 국회의 견제를 받지 않는 중앙행정부처의 독자적 판단과 해석을 제도적으로 허용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문화정책의 ‘불투명성’, 그리고 행정부의 독자적인 권한의 증대는 행정조직의 규모 확대와 조직 간 관료제적 통합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문체부의 점진적인 관료화는 인사권을 무기로 한 대통령 및 대통령비서실의 권한 행사에 무력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즉, 문체부 내외부의 관료제적 통합과 대통령비서실의 관료 장악을 통해 대통령의 ‘말씀’은 무소불위한 권력의 원천이 될 수 있었다.

한편 위와 같은 구조에서 ‘정책적 결정’의 책임 소재를 규명하는 작업에 긴 시일이 걸렸던 점은 그러한 결정이 은폐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문체부의 활동은 ‘문화융성위원회’를 바탕으로 한 문화정책과 예술인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창작지원정책으로 구별되어 이루어졌다. 전자는 대대적인 홍보의 대상이었지만, 검열과 배제를 위한 후자는 관료제적 명령체계를 통해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이 점에서 ‘정책적 결정’이라는 관행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정책적 결정’이란 상급의 관료 혹은 행정기관의 장이 결정의 주체임을 암시하는 용어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국민을 그 결정의 주체로 보고 있지 않다는 뜻이며, 문화 정책이 논의되고 전달되는 과정이 은밀하게 ‘블랙박스’에 담겨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박소현은 그 블랙박스를 없애고 ‘정책적 결정’에서 국민의 주권자적 지위가 복권되는 것이 기존의 관행을 타파하기 위한 선결 조건임을 강조했다. 나아가 표현의 자유 역시 단순히 예술 표현의 자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이와 같은 정치적 자유, 즉 집회·결사의 자유 등과 함께 보장될 때에만 온전하다는 것이 박소현의 결론이다.

■ 문장원 기자 creep0927@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