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형님 리더쉽의 귀환
2014년 두산 베어스는 엄청난 부진 속에 리그 6위로 시즌을 마칩니다. 모기업의 재정난, 무능한 프런트, 경험이 없을뿐더러 야구관마저 구식인 감독, 주축 선수들의 이적 등 수많은 악재 속에서 2003년 이후 처음으로 잠실 라이벌인 LG 트윈스보다 낮은 순위를 기록한 것입니다. 2013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일궈냈던 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팬들의 실망과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구단이 꺼내든 카드는 김태형 감독의 선임이었습니다. 선수 시절 두산의 안방마님이자 주장으로 활약했으며 이후 코치로도 오랜 기간 활동하며 1995년,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이바지한 프랜차이즈 스타의 귀환. 정수근, 김동주, 타이론 우즈 등 불같은 성격을 가진 선수들을 휘어잡았던 리더쉽을 통해 구단을 재건하려 했던 것입니다.
김태형 감독은 빠르게 구단을 추슬렀습니다. 번트 등의 작전보다 강공을 선택하는 선 굵은 빅볼, 안전한 플레이 대신 한 베이스 더 가는 공격적인 주루, 선수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는 믿음의 야구 등 기존 두산 특유의 야구를 되찾았던 것입니다. 경기 외적으로도 거침없이 직설적인 언론 대응을 통해 두산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김태형 감독의 지도에 힘입어 두산 베어스는 정규 시즌을 3위로 마무리합니다.
2. 가을은 곰이 살찌는 계절
사실 두산의 2015년은 순조롭게만 진행되진 않았습니다. 구단 전력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용병들의 부진은 정규 시즌의 순위 경쟁에서 뒤처진 직접적인 이유였습니다. 구단의 1선발 더스틴 니퍼트는 잦은 부상에 신음했고 투수 유네스키 마야, 타자 잭 루츠 모두 극심한 부진으로 각각 앤서니 스와잭과 데이빈슨 로메로로 대체되었으나 별반 다르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또한, 시즌 내내 계속된 불펜진의 부진 역시 포스트 시즌에 대한 불안감을 더했습니다.
그러나 ‘타격 기계’ 김현수를 필두로 한 타선의 응집력, 장원준과 유희관이 버틴 선발진보다 더욱 큰 두산의 장점은 바로 가을 야구 DNA였습니다. 당시 최강팀 현대 유니콘스와 접전을 펼친 2000년, 2015년과 마찬가지로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했으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2001년, 정규 시즌 4위에서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1승만 남겨뒀던 2013년 등 수많은 명승부를 만들어 온 두산이었기에 팬들은 우승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포스트 시즌에 맞춰 복귀한 니퍼트, 정규 시즌 후반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 이현승 등의 가세로 만반의 준비를 한 두산의 첫 상대는 바로 넥센 히어로즈였습니다. 염경엽 감독의 지도력, 홈런왕 박병호가 버티는 타선, 든든한 필승조를 앞세워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SK 와이번스를 꺾은 넥센. 기세가 오른 상대를 맞아 김태형 감독은 염경엽 감독에겐 운이 좋은 감독, 넥센 투수 조상우에겐 무리하지 말라는 등 특유의 도발로 기싸움을 펼칩니다.
3. 에이스의 향연과 기적의 역전승
두산은 1차전과 2차전을 각각 니퍼트, 장원준의 활약으로 승리합니다. 니퍼트는 부상으로 정규 시즌에 보여주지 못한 구위를 선보였고 장원준의 꾸준함은 가을에도 변함없었습니다. 두 에이스의 활약으로 두산은 타선의 침체를 이겨내고 두 경기 모두 1점 차이로 승리합니다. 이에 맞서 넥센은 벤 헤켄의 역투를 앞세워 3차전을 가져옵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도 묵직한 활약을 보였던 벤 헤켄이 두산의 타자들을 압도하면서 승부의 향방은 4차전에서 가려지게 됩니다.
4차전 초반 승리의 여신은 넥센에게 미소를 보였습니다. 두산은 이현호, 노경은, 윤명준 등 여러 투수를 기용했지만 6회까지 9점을 실점하며 넥센의 타선을 막지 못했고 그동안 타선은 3회 2득점 이후 번번이 병살타로 기회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7회 2점, 8회 1점을 뽑아내며 추격의 불씨를 이어갔으나 여전히 점수는 9대5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는 마지막 9회로 넘어가게 됩니다.
2타자 연속 안타 후 중견수 뜬공으로 만들어진 1사 1,3루 상황에서 넥센은 필승조 조상우를 등판시킵니다. 하지만 김태형 감독의 뼈있는 도발처럼 이미 6일 동안 120구를 던진 조상우의 체력은 바닥나 있었고 두산의 타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허경민의 안타로 1점을 따라붙은 두산은 오재일의 볼넷으로 기회를 이어나갔고 1사 만루 상황에서 김현수의 안타, 양의지의 2루타가 터지면서 경기는 9대10으로 뒤집힙니다. 이어진 최주환의 스트라이크 낫아웃으로 1점 더 달아난 두산은 9회말 마무리 이현승을 등판시켜 경기를 잡아냅니다.
4. 신은 존재하며 그는 미국인이다
넥센을 꺾은 두산의 다음 상대는 NC 다이노스였습니다. NC는 김경문 감독 및 이종욱 등 두산에서 오랫동안 활약했던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40홈런과 40도루를 동시에 기록한 괴물 용병 에릭 테임즈와 4년간 고연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인 후 프로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선수가 된 나성범 등 두산보다 한 수 위의 전력을 가진 팀이었습니다. 그러나 두산엔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9이닝 완봉승을 거두며 1차전을 승리로 이끈 니퍼트는 2차전과 3차전을 내주며 벼랑 끝에 몰린 팀을 구하기 위해 고작 3일 휴식 후 4차전에 등판합니다. 하지만 7이닝 무실점이라는 굉장한 활약으로 2이닝 동안 쾌투를 펼친 이현승과 함께 승부의 균형추를 맞췄습니다. 계속된 부상으로 에이스 역할을 하지 못한 정규 시즌에 아쉬움을 털고 자신이 어째서 ‘잠실 예수’, ‘니느님’이라고 불리는지 증명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한국시리즈 진출팀을 가리는 마지막 5차전. 두산의 선발은 장원준이었습니다. 2차전 7이닝 무실점 역투에도 불구하고 불펜진의 난조로 승리를 기록하지 못한 것을 자책한 그는 6이닝 동안 4점을 내주면서도 꿋꿋이 마운드를 지켰습니다. 니퍼트와 마찬가지로 부족한 휴식, 정규 시즌으로부터의 피로 등을 고려하면 나무랄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벤치로 가 머리를 움켜쥐며 자책하는 모습은 두산 팬들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두산의 타자들은 그런 장원준의 모습에 5회 단숨에 5점을 뽑아내어 경기를 뒤집으며 호응했고 가을 야구에서 철벽 마무리로 각성한 이현승의 3이닝 무실점에 힘입어 한국시리즈에 진출합니다.
5. 곰, 2년 전 흘린 눈물을 닦다
한국시리즈 상대는 류중일 감독이 이끄는 삼성 라이온즈였습니다. 무려 5년 연속 정규 시즌 우승과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삼성은 당대를 넘어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강한 팀 중의 하나였습니다. 2년 전 기적의 우승을 노리던 두산의 앞길을 끝끝내 막아섰던 상대 역시 삼성이었습니다. ‘라이언킹’ 이승엽과 역대 용병 타자 최다 홈런의 야마이코 나바로 등이 역대 정규 시즌 최고 팀타율을 경신한 타선과 최초로 5명의 10승 투수를 배출한 선발진을 보유한 삼성은 정규 시즌에서도 두산을 11승 5패로 압도하던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삼성에 엄청난 악재가 발생합니다. 1선발 윤성환, 홀드왕 안지만, 세이브왕 임창용이 불법 원정 도박 혐의로 팀을 이탈한 것입니다. 졸지에 팀내 최고 투수 3명을 쓰지 못하게 된 삼성과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두산의 대결은 정규 시즌의 전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건재한 삼성의 타선, 많은 경기를 치르며 떨어진 두산의 체력, 여전히 존재하는 전력 차이, 2013년 맞대결 패배 경험 등은 두 팀의 승패 예측을 쉽사리 뒤집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두산은 1차전을 나바로의 3점 홈런과 투수진의 실책으로 내주고 맙니다.
그러나 두산은 무너지지 않았고 활화산 같던 삼성의 타선은 두산 투수들의 활약에 차갑게 식어버리고 말았습니다. 2차전 선발로 나서서 7이닝 무실점과 함께 포스트 시즌 연속 이닝 무실점 신기록을 경신한 니퍼트, 3차전 2번의 우천 중단 속에서도 127구를 던지며 7.2이닝 동안 1실점으로 막은 장원준의 활약으로 두산은 2연승을 거둡니다. 4차전에선 선발 이현호가 일찍 실점하며 교체되었으나 부상 및 모친상 등을 겪으며 시즌 내내 부진을 거듭하던 노경은이 혼신의 5.2이닝 무실점 역투로 팀의 승리를 이끕니다. 선수 생활 중 최고의 투구를 선보이며 포효하는 노경은의 모습은 두산 팬들을 열광하게 했습니다.
우승까지 단 1승을 남겨두고 거짓말 같은 3연패로 끝났던 2013년의 비극은 되풀이되지 않았습니다. 번번이 한국시리즈에서 부진하며 구단의 준우승을 지켜봤던 김현수, 1차전에서 입은 손가락 부상을 견디고 경기에 나선 정수빈, 역대 단일 포스트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한 허경민 등의 타자들은 5차전 초반부터 불같은 타격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전성기 이후 부상과 부진으로 오랫동안 침체기를 겪었던 고영민의 몸을 아끼지 않는 주루는 노경은에 못지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투수들의 활약 역시 끝까지 이어졌습니다. 정규 시즌 구단의 1선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유희관이 선발로 나와 6이닝을 2실점으로 막아냈고 포스트 시즌의 영웅 니퍼트는 2.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습니다. 한국시리즈 5경기 중 4경기에 등판하며 뒷문을 든든하게 잠근 이현승이 마지막 타자 배영섭을 삼진으로 잡아내며 두산은 14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합니다.
6. 후일담 및 근황
두산은 2015년의 우승 이후 새로운 용병 선수들의 영입과 기존 선수들의 발전으로 2016년 압도적인 강팀이 됩니다. 프로야구 단일 시즌 최다승 기록과 역대 최초 15승 투수 4명 배출, 단일 시즌 최다 득점 등 각종 기록을 경신하며 1위 자리를 차지한 두산은 한국시리즈에서도 NC를 4승 0패로 꺾고 2년 연속 우승합니다. 2017년, 2018년 아쉽게도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기록한 두산은 2019년 현재에도 2위에 올라 있으면서 우승을 노리고 있습니다.
-------------------------------------------------------------------------------------------------------------------------------------------------------------------------------------------------------------------
P.S.
긴 글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도 각종 스포츠에서 약팀, 약자가 많은 이의 예상을 뒤엎고 우승한 사례들을 정리해서 글로 써보고자 합니다.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21 10:17:3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