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17)> 산티아고 순례길 19일차

멀리까지 가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가 뛰는 장면을 볼 때 내 가슴은 함께 뛰었다. 톨스토이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를 읽었을 때는 초등학생이었다. 그때 느꼈던 덧은 주인공 파흠의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자초했는지였다. 흔한 교훈적인 생각을 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고등학생이 되어 그 이야기를 다시 접하자 광활한 대지에 대한 욕구가 되살아났다. 펄 벅의 <대지>를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지는 땅. 그 곳까지 갈림 없이 하나로 이어진 대지. 한국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이러한 장면 속에 내가 있기를 바랐다.

메세타 고원이 끝도 없이 펼쳐진 길을 걷는 오늘, 내 욕망을 실현하기 좋은 날이라 생각했다. 마침 동행은커녕 같은 알베르게에 묵던 사람도 없었다. 엊저녁 일찍 잔 덕에 아침 일찍 짐을 쌀 수 있었다. 정도 넘게 친절하던 알베르게 호스트를 위해 유례없이 팁을 남기고 이른 아침부터 평야를 향해 뛰어들었다.

풍경은 달라질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딱 죽기 직전까지 걸어보자는 것이 오늘의 목적이었다. 26년 살아오며 가졌던 막연한 소원이다. 포레스트 검프처럼, 파흠처럼 아무 생각 없이 이 대지를 걷길 바랐다. 물론 텐트가 없기에 어느 마을에선가는 멈춰야 한다. 하지만 그 마을의 이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길을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노자의 말, '큰 길을 따라가기는 쉽다. 그러나 사람들은 샛길로 들어서기를 좋아한다.'가 생각나게 만드는 길이었다. 노자는 샛길은 구렁텅이로 이끄는 길이라 했다. 하지만 내 앞에 난 길은 모두 샛길인걸 어떡할까. 걷다보니 길은 오늘도 나에게 선택을 요구했다. 사아군이 저 멀리 보이는데 이정표는 오른쪽 숲길로 꺾어가길 권유했다. 큰 길과 샛길이었다. 샛길로 빠져들기 좋아하는 인간답게 샛길로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숲을 휘둘러 나가는 길이다. 그러나 잠깐 늦으면 어떠랴. 오늘의 목표는 도시가 아닌 나 자신이다. 샛길로 빠져 그 곳의 끝에 있던 벤치에서 목을 축였다.

10km를 날듯이 걸어 1시간 반 만에 사아군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침 첫 걸음을 걷듯 전혀 지치지 않았다. 맥주와 하몽 샌드위치로 이른 점심을 챙겨먹고 30분도 쉬지 않고 사아군을 떠났다. 뒤이어 있던 칼자다 델 코토, 벨시아노스, 약 27km 지점인 엘 부르고까지도 지친 기색 없이 걸었다. 신기한 일이다. 불과 이틀 전 프로미스타에서 까리온까지의 20km 짜리 길을 걸을 때는 까리온에 도착할 때쯤이 되자 발이 아프고 힘이 빠져갔다. 길은 오늘과 같은 평야였다. 하지만 목표 지점을 정해두지 않은 오늘, 나는 27km까지도 힘들이지 않고 걷고 있었다.

엘 부르고에 도착했다. 가이드북에서 오늘의 목표로 설정해둔 곳이다. 마을은 조그맣고 평화로웠다. 걷다보니 길가에 바로 문을 열어둔 알베르게가 보였다. 오늘은 이미 27km를 걸었고 가이드북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나는 쉴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을을 빠져나와 계속 걸었다. 지쳐 쓰러질지언정 오늘의 목표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다음 도시까지는 13km가 남았다.

초반에는 날듯 걸었던 13km가 꽤 긴 거리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급속도로 힘이 빠져가는 것을 느꼈다. 슬금슬금 비도 내리고 있었다. 결국 중간에 오늘의 두 번째 휴식을 갖기로 했다. 두 번째 휴식 장소는 고맙게도 비를 가릴만한 천장이 있는 정자였다. 담배를 한 대 태우고 물을 마시며 비가 소나기이길 기도했다. 다행히 비는 15분도 되지 않아 그쳤다. 20km 만의 짧은 휴식을 끝내고 다시 걸었다.

휴식 후 내가 걷던 길이 올바른 길이 아니었음은 그 다음 마을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쉬던 정자는 십자로에 있다. 정방향으로 가던 나는 잠깐의 휴식 후에 어느새 직각으로 꺾인 길을 가고 있었다. 길이 많은 마을로 들어가면 마을에는 으레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는 화살표가 있다. 그리고 순례자를 환영하는 조개 문양이 마을 곳곳에 새겨져있다. 그러나 이번 마을은 달랐다. 화살표도, 조개문양도 없었다. 이미 20분 여를 걸어온 후에야 잘못된 길을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돌아가야지 별 수 있나. 두 갈래 길 중 험한 길을 택한 것도 아니고 오직 한 방향의 길 밖에 없었는데도 아예 잘못된 길을 택한 것은 나의 우둔함 때문이다. 부족한 나 자신을 탓하며 다시 20분을 걸어 정자에 도착했다. 정자는 돌아온 탕아를 맞이하는 아버지처럼 아까 그 모습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내 다리의 고통은 이차함수 그래프처럼 높아져만 갔다.

한 시간이 더 흐르고서야 드디어 다음 마을인 렐리에고스에 도착했다. 죽을 것 같았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 객사가 목적은 아니지만 객사하기 전에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인간적인 나약함은 이 곳에서 쉴까하는 욕망을 부추겼다. 우리가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꺼려진다면 이것이 과연 우리 몸으로부터의 갈급한 신호인지, 나약함 때문인지를 고려해보아야 한다. 아침 헬스를 등록했지만 오늘 나가면 왠지 아플 것 같은, 이불 속에서의 생각. 그 덕에 헬스장 등록비를 거의 대학 한 학기 등록금만큼 날렸다.

마을 밖으로 한 발짝 더 내밀었다. 마을을 벗어난 이상 이 한 발짝 이상의 것이 가능할 것 같다면 지금까지의 힘듦은 인간적인 나약함 때문이다. 침대 밖으로의 한 발짝이 힘들지 집에서 헬스장으로 향하는 한 발짝, 벤치 프레스 첫 세트의 첫 회가 힘든 것은 절대 아니라는 교훈을 그간 날린 헬스장 등록비를 통해 비싸게 얻었다. 역시 마을을 벗어난 발은 더 이상 나약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을을 벗어나고 5분도 안 되어 힘이 빠진 발목은 자갈을 밟아 접질리고, 비는 쏟아졌다. 길가에는 벤치 몇 개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아까의 중간 휴식 장소처럼 비를 피해 쉴 곳도 없었다. 욕이 절로 나왔다. 이는 하늘에 대한 욕이 아닌 스스로의 몸 상태를 파악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욕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계속 걸었다. 어차피 비는 오는데 쉬어가며 두 시간 반 동안 비를 맞을 것인지, 한번에 쭉 가서 한 시간 반 동안 비를 맞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닌 날씨다.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됐을 무렵 비가 드디어 사그라들었다. 발목은 다시 한 번 더 접질려 만신창이였다. 절뚝거리며 걸었다. 비가 그치자 이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다리 위에 올라 숨도 돌릴 겸 주변을 돌아보았다. 빌어먹을 똑같은 평야, 똑같은 도로. 나아진 것은 여전히 없고 나는 아직 보이지도 않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야 한다. 45km를 걸었다고 핸드폰이 말해준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저주하던 그 순간 나의 시선을 강탈한 것은 무지개였다. 심지어 무지개의 끝을 보았다. 무지개의 끝에는 보물이 묻혀져 있다는 전설이 있다. 그만큼 전설적인 무지개의 끝이 내 앞에 나타났다. 저 곳을 파보면 금괴가 나올까, 아니면 시대에 맞게 석유가 쏟아질까 하는 철없는 생각을 잠깐 했다. 갈 길은 아직도 멀다. 다음 마을까지 무려 4km를 더 가야 한다. 여느 때 같으면 40분도 안 걸려 갔을 거리지만 지금은 1km가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음을 멈추고 무지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끝에 있는 금괴라도 보듯이.

물론 로또를 세 번 정도 맞을 운명의 누군가가 그 끝만 따라다니며 작정하고 판다면 모를까 무지개 끝의 보물은 없다. 그러나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끝에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있는 듯이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매년 수 만 명의 순례자들이 이 길을 걷는다. 사실 나도 무지개 끝의 보물을 좇는 소년처럼 이 길에 섰다. 끝없이 펼쳐진 이 길의 끝에 도달하면 천지가 개벽하며 새로운 나 자신이 주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순례길을 반 이상 걸은 지금 나는 물론 가끔 마주치는 그 누구에게도 변화는 없다. 하지만 그 모두가 본연의 모습에 충실함을 느낀다. 나누는 자는 나눈다. 받는 자는 받는다. 예민한 자는 예민하다. 미친 자는 미친 자이다. 경쟁에 익숙한 자는 타인을 제치려 노력하고 느긋한 자는 느긋하다. 본연의 모습은 바뀐다기보다는 오히려 강화된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장님이 눈을 뜨는 등의 기적은 없다. 그러나 그 속에서 대다수의 이들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본질대로 행복하게 이 길을 걸어나간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 하면 다리가 찢어지지만 황새가 뱁새의 날갯짓을 따라하려면 날개가 찢어질 것이다.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 본연의 모습을 버리고 사는 것은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양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는 거칠고 틀에 박혀있기 때문에 본인의 본질을 잊어버리기 쉽다. 바로 그것을 산티아고 순례길은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는 것이 아닐까?

산티아고까지의 여정도 어느덧 반이 넘게 지나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보다 훨씬 먼 거리를 걸었다. 그 간 내가 무엇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왜 이 길을 내가 걷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했었다. 날이 갈수록 내가 전에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은 사라지는데, 내 자신에 대한 이해는 깊어져만 간다. 결국 이 길의 끝에 서면 내가 찾던 무언가는 사라지고 말 수도 있다는 두려움 역시 있다. 그러나 한 발짝 물러나서 이 길을 걷는 모든 순간에 집중하고 감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처음 해보았다. 쌍무지개의 끝은 그 끝에 보물이 없더라도 보는 그 자체로 숭고하고도 아름답기에.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4 17:4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