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21)> 산티아고 순례길 25일차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지는 달을 보며 걷기 시작해 지는 해를 보며 걸었다. 헤드랜턴을 비추며 어둠과 안개 속을 걷다보면 등 뒤로는 해가 떴다. 등지고 걷던 해가 어느 새 나를 지나쳐 점점 내려가기 시작하면 등 뒤로는 달이 뜨기 시작했고, 그때쯤 그날의 안식처에 도착하곤 했다. 그러나 걸은 지 십 여일이 지나자 익숙함이 나를 덮쳤다. 서둘러 일찍 출발하기보다는 여유롭게 출발하는 것을 추구했다. 하지만 불타오르던 아스토르가에서의 일출은 일출을 보며 걷고 싶은 내 욕망에 다시 불을 지폈다.

새벽같이 일어나 컵라면으로 아침을 대충 때우고 짐을 쌌다. 50km를 걸은 날 이래 나를 계속 괴롭히던 왼 발목은 조금 괜찮아진 듯 했다. 밖은 아직 빛 한 줄기 없는 어둠이다. 첫 날처럼 헤드랜턴 빛에 의존하여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갔다. 오늘은 해발 1400m가 넘는 큰 산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산꼭대기에는 지은 죄를 내려놓는다는 철의 십자가가 있다. 철의 십자가에서 일출을 맞이하고 싶었다. 어둠에 휩싸여 20m 앞도 보이지 않는 산길을 걸었다.

걷다가 힘들 때는 하늘을 보게 된다. 끝이 없는 자갈밭, 게다가 오르막. 중간에 침낭이라도 펴야하나 싶던 첫날 이래로 제일 많이 하늘을 보며 걸었다.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별들의 고향이라는 이명이 붙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정작 별을 본 적이 얼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드랜턴을 잠깐 끄고 아무 불빛도 없는 하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밤하늘, 그것이 특히 달빛만이 영롱한 밤하늘이라면 밤하늘은 보면 볼수록 보는 자를 황홀경에 휩싸이게 한다. 달과 큰 별 몇 개만이 존재하는 검은 도화지에 점을 찍듯 희미한 별들이 피어오르고 이내 밤하늘은 검은 구석 하나 없이 크고 작은 별들로 빛난다. 이때만큼은 은하수가 부럽지 않다. 다만 이 황홀경은 아주 조그만 인공의 빛 하나로도 충분히 흐트러질 수 있다. 요즘 주변에 가로등 하나 없는 곳은 흔치 않기에 그 장소 그 시간은 내게 매우 소중하게 다가왔다. 세이렌의 노래에 홀린 뱃사람들이 흔쾌히 목숨을 내던지듯 그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황홀했다.

살을 에는 듯한 산바람에 정신이 퍼뜩 들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은 가도 가도 썩 친절하지 않았다. 푹신해보이는 낙엽길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 옆에는 세월의 풍화로 인해 기반암이라도 튀어나온 듯 날카로운 암석길이 있었다. 낙엽길로 가다가 군데군데 숨은 자갈을 밟아 발을 접질릴 뻔 했다. 이 곳에서 낙엽길은 보기에 좋을지는 몰라도 걷기 좋은 길은 아니다. 숨어있는 자갈이 언제 어디서 발목을 노릴지 모른다. 반면 바위길은 투박하나 정직하다. 보기에는 아찔하지만 그만큼 위험이 뻔히 보인다. 위험을 피해 걸어도 미끄러질 수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낙엽으로 위장한 자갈을 밟아 발목이 돌아가는 것보다는 낫다.

한 시간 즈음 올랐을까. 다시 한 번 하늘을 보며 쉬었다. 하늘의 색은 어느덧 검은 색에서 남색으로 변했다. 등 뒤를 돌아보니 동쪽 산맥 너머로 붉은 기가 돈다. 철의 십자가에서 맞기를 애타게 바라던 일출이다. 별을 보느라 발걸음이 늦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일출은 쫓아가 잡는 것이 아닌 기다리는 것임을 일전에 깨달았다. 정신없이 일출을 쫓아가다보면 정작 중요한 순간을 놓치고 만다. 초점이 빠름에 치중되기 때문이다. 과정에 치중하느라 결과를 망치는 꼴이다.

하루 중 제일 거룩하고도 경건한 시간은 단언컨대 일출과 일몰이다. 영웅 신화를 보면 비범한 탄생과 죽음이 두드러진다.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고, 죽을 때는 하늘로 올라가 7일 뒤 몸만 땅으로 떨어졌다고 전해진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비범한 태몽을 가졌지만 모기에 물려 요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업적으로만 본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박혁거세는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박혁거세의 이야기는 신화라 일컬어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야기는 일대기로만 남아있다. 이렇게 비범한 탄생과 죽음은 신화와 일대기의 분수령이 되었다. 우리의 하루가, 일 년이, 일생이 신화가 되려면 하루의 시작과 끝 역시 훌륭해야 한다. 그래서 시작과 끝을 중요시하는 풍조가 세계 곳곳에 있나보다.

일출은 빠르면서도 느리다.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을 때는 변하는 것이 없다 싶다가도 눈을 돌리면 어느새 저만치 올라와있다. 좀 더 좋은 자리에서 일출을 보고 싶어 자리를 옮기면 하늘은 이미 밝아져버렸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매 순간이 절경이지만 단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 게걸음을 치며 눈 속 깊이 모든 순간을 담았다. 해가 완전히 뜨고 여운마저 지워진 후에야 다시 제대로 걸을 수 있었다.

철의 십자가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파랗고 해는 꽤 높이 떠있었다. 철의 십자가, 거창한 이름이지만 사실 높은 기둥에 철로 만든 십자가가 하나 박혀있을 뿐이다. 순례자들은 생장에서부터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에 상응하는 돌을 가져온다. 그 무게를 지고 걷다가 이 곳에 돌을 올려놓는다. 그 사실을 안 지 얼마 안 되었기에 나는 그저 산 밑에서부터 들고온 작은 돌 하나를 올려놓았을 뿐이다. 이미 십자가 아래는 십자가가 생긴 이래 꾸준히 쌓여왔을 돌들이 모여 작은 돌산을 이루고 있었다. 조그만 조약돌부터 바위인지 헷갈릴 법한 큰 돌도 있다. 나는 바위라도 이고 왔어야 했나 싶다.

휴식을 취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바로 앞 마을에서 잤다던 J와 C이다. 잠깐 해후의 시간을 가졌지만 얼마 되지 않아 걸음걸이 차이로 곧 헤어졌다. 혼자 걸을 때는 혼자 걷는 대로, 함께 걸을 때는 함께 걷는 대로 걷는 맛이 있다. 걸음이 빠른 J는 앞서가고 나와 걸음이 비슷한 C와 발맞추어 걸었다.

걷다가 이상한 외침에 고개를 돌려보니 한 사내가 소들을 이끌고 있다. 목동이라는 직업은 사라진 줄로만 알았는데 이곳에는 번듯하니 살아있다. 과거의 목동이 걸어 다녔다면 이 목동은 픽업트럭을 타고 다닌다는 것 외에 바뀐 것은 없다. 사내가 방울을 흔들면서 뭐라고 외치면 소들은 최면이라도 걸린 듯 일렬로 사내를 따라간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보는 것 같다. 소들은 꽤나 영리한 동물이다. 닭대가리라는 욕을 듣는 닭의 평균 아이큐가 7, 개가 25인데 소는 30이라 하니 닭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개보다 영리하다. 또한 감성적인 동물이다. 도살장에 끌려갈 때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저 소들은 당장 도살장으로 끌려가진 않아도 언젠가는 다가올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겠지. 그런데도 열을 지어 사내를 따라간다. 무엇이 저 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무엇에 이끌려 이곳에서 일렬로 산티아고를 향해 걷고 있는가.

소의 영상을 찍다 카메라 배터리가 부족해져 보조 배터리를 찾아 슬링백을 뒤졌다. 그러다 여권과 크레덴시알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가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머리는 멍한 상태다. 생각해보니 어제 체크인을 하고 너무 피곤한 나머지 그대로 쓰러져 잤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씩 되짚어갔다. 그 어디에도 여권을 다시 슬링백에 넣은 기억이 없다. 아침에 떠날 때도 도둑처럼 모든 걸 배낭에 우겨놓고 떠나왔다. 그런데 배낭에도 슬링백에도 여권은 들어있지 않다. 여권은 숙소에 있을 것이다.

숙소에 전화를 해보았더니 받지 않는다. 하릴 없이 돌아갔다. 어차피 정해져있지 않은 일정이라고, 오늘은 내일 걸을 길을 미리 한 번 걸어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돌아가며 함께 걷느라 소홀했던 주변 풍경을 보았다. 보이지 않던 능선과, 눈이 쌓인 봉우리, 산 밑에 가라앉은 안개가 보였다. 꽤 먼 거리를 돌아가야 했지만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다시 봉우리를 넘어 철의 십자가를 보았다. 죄를 떨구지 않은 대신 여권을 떨궈놓고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철의 십자가 앞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번호를 보니 숙소 주인이었다. 안 되는 스페인어로 주접을 떨어가며 상황을 설명했다. 여권을 놔두고 와서 돌아가고 있다고, 그곳에 있다면 보관만 해달라고 했다. 친절한 호스트께서는 목적지를 물으시고는 그럴 필요 없다며 감사하게도 오늘의 숙소까지 친히 가져다주시겠다고 하셨다.

내심 걱정을 했는지 안 그래도 편하던 마음이 더욱 편해졌다. 하루에 같은 봉우리를 세 번 넘어도, 다시 한 번 날선 골짜기를 내려가도, 양쪽 발목이 빠질 듯 해도 그저 행복했다. 오늘도 몸과 마음을 뉘일 숙소가 있구나, 내일도 새로운 풍경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기쁨이 발목의 아픔보다 훨씬 컸다. 한국에서는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도 곧 이어 얼굴을 드미는 다른 문제로 골머리를 썩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단순히 먹고 잘 곳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프랑스인 로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Camino will give you everything. You won't worry."

그렇다. 까미노는 오늘도 나에게 먹을 곳과 잘 곳, 세상에 대한 많은 생각을 준다. 그러나 아기가 단순하기 때문에 집과 밥과 세상에 대한 사실 하나하나를 부모님 품 안에서 얻을 수 있듯, 오직 단순해져야만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길을 걷다 몸이 원하면 아무 곳에나 앉아 점심을 먹는다. 길을 걷다 몸이 원하면 보이는 숙소에 들어가 잠을 잔다. 아무 걱정도 없다. 이렇게 나는 점점 더 단순해지는 중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8 05:13:51: